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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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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우울증 환자는 명명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말로도 의미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이유다. 이 사람은 말을 해야 할 아무런 의미도 보지 않는다.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옮김,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4, 121.

 

 

누군가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후에야 그 사람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새로운 애도의 표어는 표현할 수 없는 애도를 단 세 글자로 압축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대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지못미라는 세 글자만으로 남겨진 자의 슬픔은 축약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못미라는 깔끔한 신조어는 아직 제대로 의미화될 수 없는 죽음을, 사라짐을, 소멸을 성급하게 타임캡슐에 담아 밀폐해버리고 싶은 심리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삶마저 황폐화시키는 죽음은 결코 쉽게 의미화될 수 없다. 고통을 표현하는 어떤 절박한 언어도 먼저 간 이의 빈자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규격화된 의미의 포장지 안에 가둘 수는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죽음을 견디기 위한 각종 이벤트를 발명해낸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형식이 개발될수록,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새로운 죽음의 의미부여에 상처받을 수도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이 날로 진화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더욱 삶으로부터 타자화하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유명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대한 죽음의 행렬은 기실 저마다의 고통스러운 삶을 애도하는 각자의 몸부림의 집합이 되기도 한다. 어떤 정교한 이벤트도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담아내기는 어렵다. 죽음은 추모의 형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이 남겨진 자의 가슴에 남기고 간 상처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빈자리속에서, 오직 각자의 내면에서 철저한 고독 속에 경험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흔적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겐 그래서 함께 슬퍼하는 사람의 존재가 너무도 절실하다.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의 가슴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자라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애도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애도 자체도 타자를 필요로 한다. 내 슬픔의 창을 비춰줄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슬픔을 바라보고 내 슬픔을 객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우리는 내 안의 다른 것들조차 함께 잃는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뿐 아니라 그와 연관시키고 있던 모든 가치와 무형의 감정까지도. 애도는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하나하나 뒤늦게 발견하게 만든다. 무의식의 서랍 속 깊숙이 숨겨져 있어 잃어버린 지도 몰랐던 기억과 대상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고고학적 유물처럼 해석하고 닦아내고 다시 보관하고 다시 의미 부여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애도이다.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명명할 수 있는 매체는 물론 언어일 것이다.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 앞에 모든 의욕을 상실한 루디. 그에게는 자신의 상실을 기호화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은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막내아들에게 말한다. “삶은 계속된다는 말은 말거라, 제발.”

 

 

내 환자들 중 내가 가장 몰두하는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일세. (……) 그 분석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힘들어서 이미 확립된 개념들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기능마저 마비시킬 정도라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 내 자기분석은 여전히 중단상태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네. 그건 말일세. 나 자신은 분석함에 있어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얻어진(마치 외부의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과 같은) 지식들만을 활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네. 진정한 자기 분석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세. 그렇지 않다면 신경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프로이트가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필립 그랭베르 지음, 김용기 옮김, 프로이트와 담배, 뿌리와 이파리, 2003, 12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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