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슈렉: 당신은 제가 상상했던 공주하고는 좀 다르네요.
피오나: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죠.
나는 가끔 ‘사람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려면 결국 우리 자신의 치부(恥部)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존재, 그 한계를 똑바로 노려보기엔 우리의 자의식이 너무 견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는 곧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숨기고 싶은 마음의 카탈로그이기도 한 셈이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아브젝시옹’을 숨기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증오하고 은폐하고 배제하는지 모두 다 말하고 산다면 하루도 멀쩡한 정신으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브젝시옹의 목록은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증오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없이 뜬소문이나 가벼운 인상만을 토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증오하는 대상들은 정말로 내 증오를 받을 만큼 대단히 혐오스러운 것일까.
슈렉은 언뜻 보면 인간혐오증에 걸린 괴물 같다. 하지만 슈렉이 진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이다. 피오나 공주를 파쿼드 영주에게도 데려오는 길에서 슈렉은 그 오랜 ‘인간혐오증’의 비밀을 동키에게 털어놓는다.
동키: 슈렉, 우리 늪을 다시 돌려받으면 뭘 하지?
슈렉: 우리 늪?
동키: 우리가 공주를 구하고 이번 모험이 다 끝나면 말이야.
슈렉: 우리? 당나귀야! ‘우리’라는 건 없어. ‘나’밖에 없어. 거긴 우리 늪이 아니라 내 늪이야. 어쨌든 가장 먼저 할 일은 늪 주위에 높은 울타리를 짓는 거야.
동키: 나 상처받았어, 슈렉. 상처받았어. 내 생각을 말해줄까? 내 생각에 네가 울타리를 짓고 싶다는 건 딴 사람이 못 오게 하려는 거 같아.
슈렉: 그래?
동키: 뭘 숨기고 있냐?
슈렉: 아냐.
동키: 오호! 네가 말한 그 ‘양파’ 같은 거구나?
슈렉: 그만해. (……) 당나귀, 경고한다! 그만 해!
동키: 누굴 못 들어오게 하려는 거야? 그것만 말해줘.
슈렉: 모두! 이 세상 누구도 내 늪으로 오지 말라고! 이제 됐어?
동키: 와우, 이제 말문이 트였군. 문제가 뭐야? 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슈렉: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냐. 딴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게 문제야. 사람들은 날 보면 “악! 도와줘! 도망쳐! 멍청하고 못생긴 오우거다!”라고 한다고. 사람들은 날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판단부터 해. 그래서 혼자 사는 게 더 좋아.
동키: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난 네가 멍청하고 못생긴 오우거라고 생각 안 했어…….
슈렉: 알아…….
슈렉은 ‘우리’라는 말이 너무 낯설다. 동키가 ‘우리’의 모험이 끝나면 ‘우리’ 함께 늪에서 살자고 말하자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 번도 ‘우리’라는 틀 안에 자신을 넣어본 적이 없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슈렉은 안다. 동키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던 첫 번째 친구임을. 동키가 ‘겉보기 등급’과는 달리 따스한 마음씨와 깊은 이해심을 지니고 있듯이, 슈렉 또한 사람들 사이에 퍼진 루머와는 달리 너무도 지적이고 용감하며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우리는 피오나 공주 또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편견’과는 다르다. 우아하고 세련되며 얌전한 ‘공주’일 것이라는 따분한 편견을 날려버리는 피오나의 거침없는 성격과 장쾌한 액션! 하지만 아직 피오나의 진짜 장점은 발휘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동화의 환상적 내러티브’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피오나는 스스로 동화의 전형적 스토리에 몸이 꽁꽁 묶인 채, 눈앞의 슈렉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파쿼드 영주’를 동화 속 왕자로 착각하고 있다.
피오나는 환상 속 왕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깥에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밤마다 모습이 바뀌는 마법보다 끔찍한 것은 그녀를 아브젝트 수용소로 추방해 버리고도 마법의 왕자만 기다리게 방치해 둔 부모의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파티에 데려가 사교계로 진출시키기에는 사랑스런 딸의 외모가 너무 끔찍했으니까. 더 끔찍한 것은 스스로 탈출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것, 그러니까 피오나 스스로가 자신을 ‘아브젝시옹’의 대상으로 인정해버린 것이었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 행위, 미소 짓는 증오, 껴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이런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서민원 역,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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