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랑은 불안과 슬픔과 혼돈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키: 당신은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요. 흠, 거짓말이었고요, 사실 못 생겼어요. 하지만 밤에만 그렇잖아요. 슈렉은 하루 종일, 24시간 못생겼어요.
피오나: 동키, 나는 공주야, 공주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 동화 속에 나오는 각종 도깨비, 다양한 괴담 속에 존재하는 ‘귀신’들이 매혹과 공포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야말로 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시옹’의 대표적 대상들이다. 그 더러움과 끔찍함이 ‘우리’의 정체성을 더럽힐까 봐 추방하고 배제했던 아브젝트들.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를 밀어내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슈렉』에서 각종 동화 속 생물을 배제해버린 ‘살균된 세계’ 듀록은 예전처럼 활기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치부’, 아브젝트를 버림으로써 점점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야만’으로 치부된 것들을 금지할수록 ‘문명’의 다양한 가능성이 사라져버리듯이, 우리 안의 아브젝트를 지나치게 배제할수록 우리 안의 ‘코라’는 질식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나답지 않은 것’을 오려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동키에게 먼저 ‘밤의 모습’을 들켜버린 피오나는 ‘공주답지 않게’ 못생겼지만, 금발의 바비인형이나 디즈니형 백설공주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는 슈렉은 분명 그녀만의 매력을 발견해낼 것이며 반드시 그녀의 ‘마법’이 풀려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동화 속 스토리의 압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오나는 아직 한 번도 누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혼자서 용을 때려눕히고 얼마든지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랑을 찾을 수 있으면서도 그녀가 스스로를 거대한 성 안에 가둔 것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키: (‘못생긴’ 피오나로 변해버린 공주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당신은 누구세요? 우리 공주님을 도대체 어떻게 했어요?
피오나: 동키, 조용히 해! 내가 공주야.
동키: 맙소사! 당신이 우리 공주님을 먹어버렸군요!
피오나: 아니, 이게 바로 나야. (……) 그래, 난 못생겼어. (……) 해가 지고 나면 이렇게 변해. 낮에는 예쁘고 밤에는 못생겼어. 이렇게 지내왔어.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를 받을 때까지. 그러면 사랑으로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될 거야. (……) 밤마다 이렇게 변신해. 이 끔찍한 못생긴 괴물로 변신해! 탑에 갇혀서, 진정한 사랑이 구해 주는 날이 오길 기다리게 되었어.
그래서 해가 지고 내 변신한 모습을 보기 전에 파쿼드 군주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해,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만이 주문을 풀 수 있어.
그녀는 영원히 성 안에 갇히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동화 속 마법의 환상에 가둠으로서 오히려 스스로를 ‘아브젝트’로 전락시킨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동화 속 스토리의 실현만을 믿으며 자기 안의 무한한 ‘코라’도 미처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위기상황이야말로 그녀가 ‘마법’이 아닌 ‘사랑’으로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아닐까.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이야말로 우리 안의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 즉 코라의 활동을 촉발하는 가장 위력적인 촉매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피오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슈렉의 불안이야말로 한 번도 타인을 자신의 늪으로 초대하지 않았던 그의 후천적 자폐증을 치유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안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불완전한’ 대상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 자신의 사랑이 궁지에 몰렸을 때 대상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열시키려는 욕망이 공존한다. 크리스테바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던 정신분석의 대가 멜라니 클라인은 애정의 대상을 상실할 것만 같은 불안과 공포야말로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정서의 핵심적 요소임을 간파했다. 사랑은 완벽한 대상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불완전한 대상에 대한 불안과 슬픔과 혼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좋은 대상을 어떻게 추리고 나쁜 대상을 어떻게 없애는가. (......) 애정 대상을 구하고 그것을 보상하고 회복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 우울증 상태에서 절망과 연결되어 있는 시도들은, 자아가 이러한 회복을 성취하는 자신의 역량에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승화와 전체적 자아발달을 위한 결정 요소들이다. (......) 나는 애정대상이 파괴되어 형성된 조각들의 승화와 그리고 그 조각들을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의 구체적인 중요성을 언급할 것이다. 그것은 조각나버린 ‘완벽한 대상’이다. 이와 같인 완벽한 대상이 약화되는 붕괴의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그 애정의 대상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게다가 완벽의 개념은 대상의 붕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제적이다.
증오하는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해왔던, 혹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종 메카니즘을 사용했던 환자들. 그들의 마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상picture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실제 대상은 아름답지 않은 것, 정말로 상처받고 치료할 수 없으며 따라서 두려운 사람으로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상은 실제 대상과 분리되어 왔지만 절대 포기되지는 않았으며 그 환자들의 구체적인 승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완벽함에 대한 욕망은 붕괴의 우울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결과 모든 승화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멜라니 클라인, 『조울증의 심리적 기원』,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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