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슬픈 히트상품, 노스탤지어……
제이크:(영혼의 나무 앞에서 기도하며) 에이와님. 정말 계신다면 저희를 도와주세요. 인간들이 대지를 파괴해버렸고 이젠 우리를 파괴하려 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네이티리:(연민과 사랑이 교차하는 누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며) 대지의 어머니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세계의 균형을 지키실 뿐이시지.
언젠가 정부 당국에서 소총과 권총을 나누어 주었지만 인디언들은 그것을 집 안에 걸어놓기만 했다. 대신에 그들은 사냥을 할 때 총기류라고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당국의 노력에 의해 날치기식으로 덮어 가리워졌던 예전의 생활방식이 재차 주장되었다. 황폐한 부락에서는 지붕들이 차례로 먼지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인디언들은 숲 속의 오솔길 사이로 줄을 지어 다녔다. 우리들은 보름 동안이나 계속하여 말을 타고 숲 속을 헤쳐 나갔다. 그런데 숲이 너무 방대하고 길을 잘 알 수가 없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어둠 속에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타고 간 말들은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나무들이 햇빛을 가로막는 어둠 속에도 조금도 길을 잘못 찾는 법이 없었다.
-레비스트로스, 박옥줄 옮김, 『슬픈 열대』, 삼성출판사, 1997년, 156쪽.
『아바타』에는 최첨단의 미래와 태고의 과거가 치열하게 공존한다. 나비족은 원시부족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담뿍 담긴 반인반수의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복원한 힘은 첨단 과학의 테크놀로지다. 『아바타』를 보며 나는 오래 전 과학의 이름으로, 문명의 이름으로 짓밟은 원시문명을 최첨단 과학의 테크놀로지로 복원하고자 하는 헐리웃 대자본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인류는 사력을 다해 인디언과 아마존의 문명을 파괴해놓고 이제 와서 잃어버린 원시문명의 잔해를 되살려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원시문명을 향한 노스탤지어는 하나의 거대한 전 지구적 산업이 되어가는 것 같다. 대중의 원시문명에 대한 향수는 ‘돈’이 된다. 그 집단적 향수에 기생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급증한다. 그런데 『아바타』의 대담성은 그 모든 상업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중의 뇌 구석구석을 스캐닝한 것처럼, 대중이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아바타』는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와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 그 사이에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한다. 우리는 단지 과거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또한 그리워한다. 지금 여기의 삶밖에 누릴 수 없는 인간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잃어버린 지도 모르면서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는 아련한 감정. 그 모호성이야말로 노스탤지어가 서식하기 딱 좋은 심리적 환경이 아닐까.
노스탤지어는 ‘단절’에 대한 공포감이기도 하다. 노스탤지어는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 과거 혹은 미래와 ‘나’의 육체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서글픈 확신 때문에 생겨난다. 그런데 『아바타』의 나비족들은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매우 지혜로운 방식으로 해소한다. 그들은 영혼의 나무를 통해 과거의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소리와 교신한다. 동물과 인간, 과거인과 현재인,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샤헤일루(교감)’를 시도한다.
그들은 세상에 한 번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단지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공존한다고 믿는다.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뿐 아니라 현재인과 과거인까지도 서로 교감하고 있다. 아무것도 진정으로 ‘사라지지 않는’ 세계이므로 때늦은 사후약방문식 노스탤지어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네이티리는 제이크에게 영혼의 나무를 통해 조상의 소리를 들려주며 속삭인다. “우리 조상의 소리. 오래된 시간의 소리야.”
네이티리의 재능이 샤헤일루라면, 제이크의 재능은 미메시스(모방)다. 동물과 식물은 물론 물과 바람과도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테이티리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뜨거운 샤헤일루를 실천한다. 제이크는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몸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록 다리를 쓸 수 없지만 불구가 되어버린 그의 신체에는 아직 치열한 육체적 단련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바타의 육체, 아니 나비족의 육체를 입자마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육체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기계와만 교신하는 쿼리치 대령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제이크의 몸은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녔고 그 핵심은 바로 사물의 이미지와 정신을 모방하여 자기화하는 ‘미메시스’의 능력인 것이다. 그가 짧은 시간 안에 나비족의 일원이 되기 위한 혹독한 통과의례의 문턱을 뛰어넘는 비결도 바로 이 걸출한 미메시스 능력에 있다. 그는 네이티리의 샤헤일루 능력을 모방함으로써 나비족은 물론 판도라의 생태계와 교감할 수 있는 막강한 ‘몸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모를레 신부는 18세기에 이렇게 썼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또는 연인의 품)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 순간조차 아름다움은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움은 간혹 한 찰나에 불과하다.” 사진은 바로 이 기회를 잡았다. 사진은 그것을 보여준다. 순간성, 바로 그것이다. ‘눈속임 그림’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 아니 잘 못 보는 것, 또는 그저 스치듯 보는 것. 그래서 이제는 영원히 보게 될 것을 잡아내고 보여준다.
-레비스트로스, 고봉만 류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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