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과잉 커뮤니케이션 VS 과소 커뮤니케이션
그레이스: 난 과학자라는 걸 잊지 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안 믿어.
제이크: 나비족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레이스: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어? (……) 그녀를 봤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제이크: 그런데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네이티리: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사회를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너무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서 서로의 문명을 끊임없이 모방하느라 점점 더 ‘차이’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A문명이 B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문명을 비교하고 정복하고 침탈하고 추격하느라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명을 만들어내기 힘든 사회라고 말이다.
낯선 문명을 만나러 떠난 여행에서도 현대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똑같아지는 글로벌 시티를 발견한다. 현대인은 늘 새로운 문명을 꿈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완전히 낯선 문명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큰맘 먹고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이미 아는 정보’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데 급급하여 진정 새로운 체험을 맛보기 어렵다.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텔레비전에서 수십 번도 더 본 후 ‘이미 잘 아는 바로 그 장소’에 가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고는 좋아라 한다. 현대인은 서로의 문명에 대한 경쟁심, 일류 문명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선진국의 문명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기만의 문명의 독창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비족은 굳이 근대 문명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자연 속에서 무한한 감사와 은총을 누리고 살아간다. 그들의 삶에 다른 참고문헌이 없기에 오로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의 것을 창조해낸다. 파괴되는 아마존이 점점 풍요로운 공동체적 감수성을 잃어가는 이유 또한,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치명적인 오류가 아닐까. 아마존의 부족들이 문명인의 영향을 받아 활이 아닌 총을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공장에서 제조한 문명인의 티셔츠 한 장에 하루 종일 힘겹게 사냥한 짐승 한 마리를 바꾸기 시작한 순간, 잡아온 물고기를 모두 함께 나눠 먹지 못하고 ‘내 가족’ 먹이기에 급급해지는 순간, 아마존의 유토피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문명의 러브콜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아마존을, ‘우리 안의 판도라’를 시시각각 침식하고 있다.
제이크가 판도라의 생태계 속에서 나비족과 함께 하는 행복의 정체 또한 ‘과소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힘에서 우러나온다. 굳이 다른 문명을 참고할 필요가 없기에, 외부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우리가 뭔가 뛰떨어졌다’는 집단적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라는 획일적인 환상은 끊임없이 문명을 ‘발전’시켜야 문명이 유지된다는 강박을 낳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역사의 진보를 위해, 집단의 진보를 위해, 개인은 언제든 쉽게 희생될 수 있다.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 제이크의 운명 또한 그랬다. 그는 아바타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형의 죽음으로 인해 ‘대타’로 투입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당했다. 쌍둥이형과 유전자가 같으니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아바타 한 명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엄청난 자본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다행히 쌍둥이’였던 제이크는 훌륭한 대체재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매 순간 분열되었다.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자신은 부상당해 다리도 쓸 수 없는 퇴역군인이라는 자괴감. 뛰어난 과학자가 필요하니 너 같은 ‘골 빈 해병’은 필요 없다는 그레이스 박사의 구박도 괴로웠고, 쿼리치 대령에게 나비족에 대한 각종 정보를 물어다 주는 스파이 생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나비족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이다. 제이크가 온갖 힘겨운 통과의례를 거쳐 나비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 그의 고민은 절정에 다다른다. 더 이상 억지스러운 미션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비족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이티리와 아름다운 밤을 보내고 ‘가시버시’의 인연을 맺은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당장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과잉 커뮤니케이션(over-communication)이라고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진정으로 문화 그 자체가 되고 무엇을 생산하려고 한다면, 문화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어느 정도까진 다른 문화에 견주어 그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과소 커뮤니케이션(under-communication) 아래에서만 문화는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독창성을 상실한 채, 세계의 어느 곳을 가든지 모든 문화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소비할 수 있는 유일한 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47~48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