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웅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것도 같은 시스템이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슈퍼맨』, 『007』, 『스파이더맨』 등 각종 액션 히어로 무비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오면 갑자기 부쩍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이런 영화들은 현란한 스펙터클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은 한 사람의 영웅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면서 수많은 관객을 무한소로 축소시킨다. 요컨대 액션 히어로 무비들은 ‘한 사람’의 탁월함을 강조하느라 모든 사람을 ‘무의미한 군중’으로 전락시키곤 한다.
그리하여 ‘영웅’이라 하면 우선 헐리웃 액션 히어로를 떠올리게 되는 많은 현대인들은 영웅에 대한 매우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영웅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영화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거대한 운명과의 전투, 동시에 우리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잔혹행위들, 한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하게 타인의 삶을 붕괴시킬 수 있는지, 동시에 한 사람이 어디까지 타인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 『타인의 삶』은 인간의 최대치와 인간의 최소치를 ‘동시에 한 몸으로’ 구현하는 매력적인 주인공 비즐러의 이야기다.
한나 아렌트에게 영웅이란 ‘탁월성’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아렌트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에서 영웅의 본성이 비롯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모든 이에게 영웅의 기질은 잠재되어 있는데, 영웅적 탁월성의 표현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적 기질을 폭발시킬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지닌 잠재적 영웅을 깨우는 무기는 바로 용기다. 여기서 용기란 자아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의지, 즉 ‘기꺼이 행위하고 말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또한 영웅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와 ‘관중’이다. 말하자면 아킬레스의 영웅성은 그것을 증언할 ‘그리스인들’의 사랑과 인정, 그리고 그의 행위를 영원히 기억되게 만든 호머 같은 시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영웅의 삶을 이야기하는 관객’의 존재 없이는 영웅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요컨대 영웅보다 더 영웅적인, 평범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항상-이미 내재하고 있는 영웅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웅에게는 본래 그 어떤 특별한 영웅적 본능도 없다고. 오히려 영웅을 영웅이게 하는 것은 ‘관객’의 눈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능력. 그것을 자기 안에서 끝없이 증폭시키고 확장하는 힘.
공연 예술은 정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공연 예술가들-무용수, 배우, 음악가 등-은 자신들의 탁월함(virtuosity)을 보여줄 관객을 필요로 하며 이는 바로 행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 앞에 나타날 타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활동(work)’을 위해서 공적으로 조직된 공간을 필요로 하며, 이 둘은 모두 행위(performance) 자체를 위해서 타인들에게 의존한다.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Penguin Book, 1997,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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