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적 선택 속에서 정체성이 매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한나 아렌트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파파라치’가 되는 사회. 개인의 자발적 행위 하나하나가 시스템의 질서로 환원되어버리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의미 있는 공동체(meaningful community)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타인을 바라볼 때 우선 경계심과 의혹을 먼저 갖게 되며 타인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이나 기본적인 배려조차 상실하기 쉽다. 『타인의 삶』이 묘사하고 있는 동독사회뿐 아니라 ‘www’ 시스템으로 이제 실시간으로 서로의 삶을 지치지도 않고 탐색하고 있는 ‘자유세계의 세계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전 세계 네티즌은 타인의 삶을 향한 일종의 관음증 상태에 빠지곤 한다. 개인이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소외시키는 이러한 상황은 ‘감시받는 자’ 뿐 아니라 ‘감시하는 자’에게도 해당된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조차도 권력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에게도 이 ‘감시하는 자의 역설적인 부자유’는 더욱 뼛속 깊이 인식된다. 감시당하는 자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아직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청과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아직 마음껏 서로를 사랑하고, 마음껏 자신들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비즐러는 아직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갇혀 있는 상태’인지 모른다. 그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고 타인의 정보를 착취하는 것이 자신의 빛나는 재능이라 믿고 있다. 그는 영혼의 자유를 빼앗긴 고통을 아직 깨닫지 못하기에 정체성의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그는 자유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를 되찾기까지 더욱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할 것만 같다.
요컨대 누가 더 갇혀 있는가. 자유로운 창작을 금지당한 극작가 드라이만,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마음껏 고를 수 없는 여배우 크리스타, 혹은 예술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비밀경찰? 이들 중 누가 더 갇혀 있는가. 누가 더 자유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비즐러가 예술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생활을 도청장치를 들이대는 순간, 그는 이미 두 예술가의 모든 욕망을 통제하는 폭력의 미시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우리는 매순간 어떤 권리를 지키거나 포기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되찾아주는 크고 작은 욕망의 네트워크 속에서 움직인다. 이 모든 규범화된 ‘행위(behavior)’들이 정치적 ‘행동(action)’ 혹은 ‘실천(praxis)’의 요소가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의 정체성이 정치 행위의 ‘전제’가 아니라 정치행위의 ‘결과’라고 믿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크고 작은 정치적 선택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매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예술가의 창조 행위를 감시하는 비밀경찰 비즐러, 정부의 감시망을 뚫고 창작의 자유를 찾아 헤매는 극작가 드라이만, 수많은 남성들의 이상형이자 창작의 뮤즈가 되어온 연극배우 크리스타. 이 세 사람은 각각 어떤 정치적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실현하게 될까.
공통감각(common sense)은 사적인 감각과 다르게,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축한 세계에 기반하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공통 감각은 개별적인 오감을 통해 획득한 지각 내용을 세계성(worldiness)의 현실성과 사실성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공동체에서 공통 감각의 감소나 상실, 그에 비례하는 미신이나 기만의 증가는 세계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한나 아렌트,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이후, 199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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