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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너’와 ‘나’를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하여] - 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너’와 ‘나’를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하여] - 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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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역사의 법칙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우연적 행위야말로 중요한 정치적 변수라고 믿었다. 인간을 법칙이나 시스템에 구속시킬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하는 행위의 중요성은 약화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가면 뒤에 숨어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책임감을 잊기 쉽다. 더구나 국가라는 커다란 단위로 이루어지는 정치 공간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살갗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대면성의 정치가 실종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태도는 결국 나 하나가치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아렌트는 시민 각각의 대면적참여야말로 탈정치화되고 사생활 중심주의에 빠진 사회의 정치적 대안이라고 보았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는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방패막아 삼아 한 예술가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음껏 감시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살고 있는 집 모든 곳의 구조를 비즐러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거실과 서재뿐 아니라 침실과 화장실까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는 비즐러의 헤드폰으로 흘러들어간다. 비즐러는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공적 언어로 번역하고 정리하여 보고할 의무를 지닌다. 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의 모든 사적 활동공적 언어로 변형될 필요는 없다. 비즐러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보만을 편집하고 가공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셈이다. ‘국가라는 시스템과 개인이라는 감시대상 사이에서 비즐러는 잔혹한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바로 이 메신저의 매우 사소한 행위극히 주관적인 감정에서 예기치 못한 시스템의 균열이 탄생한다. 개인은 시스템을 체화할 수는 있지만 개인의 존재 전체가 시스템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특별히 수집할 정보가 없는 영화 초반부에서 비즐러는 감시자라기보다는 엿보는 자에 가깝다. 드라이만의 아내 크리스타의 미모와 연기력에 매혹된 비즐러는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그녀의 몸이 내는 각종 소리로 그녀의 생생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드라이만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 비즐러는 변함없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며 보고서를 작성한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선물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즐거워하는 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비즐러는 아련한 감상에 젖는다. 아름다운 여배우 크리스타를 향한 그의 동경이 드라이만에 대한 은밀한 질투와 뒤섞인다. 그는 동독 경찰의 일분자로서 냉철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의 공적인 역할이 연극을 사랑하고 배우를 동경하는 한 사람의 자유까지 말살하지는 못한 것이다.

 

 

크리스타: (누군가 드라이만의 생일 선물로 준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짓는다) 이 포크 좀 봐, 예쁘지 않아? 샐러드 만들 때 쓰는 거야.

드라이만: (아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어디에 쓰는 거든 예쁘잖아.

크리스타: (드라이만의 친구가 선물한 만년필을 바라보며) 이것 좀 봐, 이걸로 글을 쓰면 되겠군.

드라이만: 그만 토마스가 준거야, 그의 취향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얼굴로 악보 하나를 들어올리며) 이건 알버트가 준 거야.

크리스타: (작가 알버트에 대한 드라이만의 신뢰와 부채의식을 알기에) 그럼 당신 맘에 꼭 들겠네.

드라이만: (알버트가 준 악보의 제목을 읽는다)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드라이만은 존경하는 작가 알버트가 국가의 검열 때문에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알버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드라이만을 바라보며 더욱 자괴감에 빠져 있다. 그런 알버트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드라이만은 알버트가 자신에게 준 악보가 어떤 불가능한 구원을 향한 절박한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는 드라이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비즐러의 가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의 해일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그 불가해한 격정의 진원지를 알 수 없는 그는 여전히 사무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 “1104p.m. 라즐로와 CMS(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암호)는 선물을 풀었고 그 후에 두 사람은 섹스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여러분이 혼자였을 때 발견한 무엇인가를 말로 하든지 글로 쓰든지 어떻게든 다른 이들이 검토할 수 있도록 알려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면 고독 속에 쏟아 부었던 모든 노력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스퍼스의 말을 비리자면, 진실은 내가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철학적 진실에 일반적인 타당성은 없습니다. 철학적 진실이 가져야만 하는 것은 일반적 의사소통 가능성(general communicability)”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명입니다. 특히 그런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룰 때에.

-한나 아렌트, 칸트에 대한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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