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
이젠 뭐든 당신 맘대로 쓸 수 있잖소, 이게 당신이 꿈꾸던 나라 아니었소?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연방 독일이 진정으로 예술가들이 원했던 거요? 더 쓸 게 남아 있소? 사람들에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소. 여긴 진정한 자유가 있는 연방공화국인데 말이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독일이 통일된 후 2년이 지나고, 드라이만은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다른 배우가 공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듯 보인다. 그는 헴프 장관을 우연히 만나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진다. 왜 나를 연금하지 않았느냐고. 왜 나만은 감시대상에서 제외되었느냐고. 헴프 장관은 코웃음을 치며 드라이만을 조롱한다. “당연히 당신도 철저히 감시를 당했소. 우리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 당신의 성생활까지도. 당신의 모든 걸 말이요.” 당신의 성생활, 당신의 모든 것이라니. 소중했던 모든 것이 안보부의 도청 시스템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아내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된 드라이만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서재는 물론이요 침실과 화장실까지, 일상의 숨소리가 닿는 모든 곳에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도청장치를 발견한다. 내 모든 것을 감시당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그는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어가며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찾았는데, 막상 ‘창작의 자유’를 찾은 그는 무엇을 집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누군가 나의 삶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것이 분명한데, 눈에 보이는 외상이나 피해조차 없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고통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누군가 내 삶의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생방송’으로 청취하고 있었다는 것, 그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음을.
드라이만은 자신의 집이 도청당한 경과가 기록된 문서를 찾게 되고 드디어 ‘게오르그 드라이만에 대한 감시 보고서’의 전모가 밝혀진다. 드라이만은 자신이 감시당한 경위를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드라이만의 예상과는 달리 크리스타는 ‘모든 것’을 누설했고, ‘HGW XX/7’라는 미지의 인물이 타자기를 숨겨주었다는 것을. 드라이만은 자신을 도청한 인물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자신을 구원해준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는 왜 나를 감시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지켜준 것일까.
드라이만은 수소문 끝에 ‘HGW XX/7’라는 인물이 비즐러임을 알게 된다. 그는 비즐러를 찾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우편물을 나르는 잡역부 일을 하는 비즐러의 초라한 뒷모습을 발견한 드라이만 그는 비즐러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자동차를 멈춘 채, 마치 어떤 내면의 계시를 들은 사람처럼 희열에 찬 표정을 짓는다.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서 진정한 영감의 원천을 찾은 것 같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막상 자유를 찾은 후에도 글쓰기의 동력을 얻지 못해 방황하던 드라이만에게 마침내 ‘뮤즈’가 찾아온 것이다.
다시 2년 후. 비즐러는 우연히 ‘칼 마르크스’ 서점 근처를 지나다가 낯익은 인물의 얼굴이 찍힌 도서 광고포스터를 발견한다. 책 제목은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 저자는 게오르그 드라이만. 그는 자신의 마지막 도청 대상이었던 드라이만이 쓴 책을 발견하고 서점에 들어간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는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채 커피 한 잔 마셔본 적이 없는 ‘친구’에게서 첫 번째 ‘편지’를 받는다. “‘HGW XX/7’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 비즐러는 이 한 줄의 헌사로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를 찾아와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대신 2년 동안 온힘을 다해 비즐러를 위한,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를 해낸 드라이만의 ‘선의’를. 모두가 ‘악인’이라 손가락질할 것만 같은 비즐러 자신의 마음 깊숙이 감춰져 있던 ‘선의’를 알아봐주고 그 선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 준,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의 사랑을. 그는 그 한 줄의 ‘헌사’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멜로디, 도청장치를 통해 들려오던 천상의 음악,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가 다시금 비즐러의 마음 속에서 연주되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 해도, ‘친구’가 없다면 아무도 그런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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