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자 강의의 선각자 다석 류영모
이러한 우리 조선땅, 도가철학 불모지에서, 금세기에 유일하게 『노자』를 강해하고 『노자』의 지혜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전파한 선각자가 한 분 계셨으니, 그 분이 바로 이승훈, 조만식을 뒤이어 제3대 정주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다석(多) 유영모(柳永模, 1890~1981)선생이시다.
다석선생이 오산에 교장으로 계실 때, 춘원 이광수가 국어선생으로 있었고, 함석헌이 4학년 학생이었다.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20세기 조선 기독교의 거맥을 형성한 김교신(金敎臣, 1901 ~ 1915)도 그의 감화를 받은 제자다. 영락교회의 한경직, 순교자 주기철, 그리고 김주항, 함석헌, 송두용 등이 모두 다석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함석헌은 유영모의 정통 제자로 자처, ‘다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곤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함석헌선생을 자주 뵈웠다. 그분의 씨ᄋᆞᆯ농장이 우리 아버지가 병원개업하고 있었던 천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하얀 수염이 덮인 흰 두루마기차림의 함석헌 선생을 나는 참으로 ‘잘 생긴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장형 김용준은 평생 함석헌을 흠모하고 따라다녔다. 우리 아버지는 장형 용준이 함석헌을 졸졸 따라 다니는 것을 그저 그렇게 생각하였다.
함석헌의 우찌무라 칸조오(內村鑑三, 1861~1930) 류의 무교회주의가 좀 황당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형 용준의 입을 통하여 ‘유영모’라는 이름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다. 자하문밖에 산다는 것, 그리고 널판지 하나에 개왓장 하나만 놓고 잔다는 것, 그리고 하루에 한 끼 밖에 안 먹는다는 것, 그리고 평생을 바퀴에 올라탄 적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도 시계와 같이 시간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YMCA 등지에서 강의할 때 괴팍하고 오묘한 말을 많이 한다는 것 …… 이런 말들을 장형 용준은 무지무지하게 많이 했다. 나는 장형을 따라 유영모선생 집회를 한번 따라가 보고 싶었는데 장형은 중학생이었던 나를 한번도 유영모선생의 집회에 데리고 가질 않았다. 아마도 막내동생인 내가 미래에 철학자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형들은 막내인 나를 무시하기만 했으니까.
나의 깊은 사색의 소질을 어렸을 때부터 알아차린 것은 오직 나의 어머니 홍승숙 한 분이었다. 사실 내가 1972년 이 땅을 떠나 유학의 길에 오를 때만 해도 유영모 선생은 장안에 건재하고 계셨다. 내가 용준의 입을 통하여 유영모 선생 말을 많이 들었을 때가 중학교 때였는데(아마 그때쯤 장형 용준이 다석선생 집회에 다닐 때였나 부다), 그 뒤로 내가 철이 들고난 후로는 내 일에만 바빴고, 또 내 삶의 문제의식에만 골똘해 있었기 때문에, 남을 찾아다니는 짓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학문을 이루고 귀국하여 유영모선생을 한번 찾아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저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후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내 평생에 다석선생을 육안으로 뵙지 못한 것을 천추, 만추, 아니 억겁의 한으로 생각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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