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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주희 당대에만 해도 가례는 정설이 없었다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장 주자학과 『효경간오』 - 주희 당대에만 해도 가례는 정설이 없었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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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희 당대에만 해도 가례는 정설이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자학의 체계가 사서중심주의로 특징 지워지고 효경이 경시되며 그 대신 소학(小學)이 부상한다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의 주자학 700년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프레임웍(framework)임에 틀림이 없지만, 소학(小學)과 더불어 반드시 고찰해야만 할 중요한 문헌이 바로 주자가례(朱子家禮)라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번쇄한 권력다툼인 예송(禮公)의 주역이었으며, 송시열(宋時烈)주자가례(朱子家禮)야말로 주자가 고금을 참작하여 시의적절하게 정립한 의례로서 그 절대적 권위가 고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송시열도 가례의 위작설에 관한 문제의식은 있었다 한다 아무도 본격적으로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으니송시열의 선생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가례의 변통에 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주자가례는 당연히 주자의 저작이며 동아시아문명의 내재적인 기본 틀이라고 전제하기 쉽지만, 주자가례(朱子家禮)야말로 주자의 생애에서 언제 어떻게 성립한 문헌인지 그 확실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주자가례는 주자의 저작이 아닐 수도 있다주자연보를 찬정(纂訂)한 청대의 왕무횡(王懋竑, 왕 마오홍, Wang Mao-hong, 1668~1741)은 독실한 주자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박(精博)한 논지로써 가례가 주자의 소찬(所撰)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가례의 성립은 대체적으로 소학(小學)성립과정과 그 상황이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어린 나이에(14)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집안에서 행할 수 있는 의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상념이 오가면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가 40세 때(1169) 모친상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구체화되어 말년에 가례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례의 성격으로 보아 주희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가례효경간오의 실패 이후에 더욱 박차를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희의 생애의 사건들과 관련하여 가례의 성립을 운운하는 제설의 배경에 깔려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주희 본인의 집안사정만 해도 부친상과 모친상에 관하여 어떤 확고하게 정해진 의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문공문집75에는 가례서가 실려있는데 거기에는 고례(古禮)와 주자 당대의 의례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을 뿐 아니라,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기복(器服)의 제도나, 출입기거의 절도가 모두 현세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뜻이 있는 군자가 고금의 변화를 참작하여 일시지법(一時之法)을 시행하려 해도 쓸데없이 자세해지거나, 혹은 아무렇게나 생략할 수도 있어, 절충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을 쫓게 마련이고, 실제적인 것은 소홀히 하고 형식적인 것만에 급급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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