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다석(多夕)의 효기독론
문화유형에 따른 효의 행동 패턴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자! 3세동당(三世同堂)의 집에서, 그러니까 연로하신 노모가 한 분 계시고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고 있는 부부가 사는 작은 집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을 해보자! 불이 훨훨 타올라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모두를 구출하기란 어렵다, 노모나 자식 중에 누구를 먼저 구출해야 할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의 기로에 있는 가장(家長) 갑돌이! 과연 갑돌이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먼저 구출할 것인가? 갑돌이가 미국사람이라면 아마도 100 중 99는 어린 자식 둘을 먼저 데리고 나올 것이다. 미국영화를 보아도 대개 그러한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다. 어린 자식에 대한 보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처럼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그려진다. 이혼부부의 이야기는 어떤 스릴러 영상물이든지간에 어린 자식에 대한 보호는 신성한 가치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 또래의 한국 남자만 해도 100중 98 정도는 본능적으로 설사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노모를 먼저 업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할 것이다: “자식은 또 생겨날 수 있지만, 부모는 바뀔 수 없는 천륜!” 그렇지만 어린 자식은 천륜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우리나라 30대 정도의 갑돌이라면 한 80% 정도는 본능적으로 자식 둘을 먼저 데리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노모는 어차피 돌아가실 날이 며칠 안 남았고, 어린 자식은 미래가 창창한데, 새 생명을 먼저 구하는 것이 옳지……’ 아마도 갑돌이가 노모를 먼저 구하고 자식이 희생되었다고 한다면, 갑돌이는 평생, 부인 갑순이의 원망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분명 시간ㆍ공간에 따라 가족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열(優劣)을 논할 수 있겠는가? 노모를 구하는 것이 옳은가? 어린 자식을 구하는 것이 옳은가? 다같이 당위에 속하는 일인데 과연 시비의 가림이 가능할까?
그런데 우리 세대의 사람만 해도 본능적으로 노모를 먼저 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더 인(仁)하다고 하는 정당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자식만 살리고 노모를 살리지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양쪽 다 살렸으면 오죽 좋으련만), 노모의 죽음이 자식의 죽음보다 더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네사람으로부터 ‘호로자식’ ‘불효자식’이라는 욕설을 듣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설명하는 이유로서 그리 불경스러운 언사는 아니다.
그 말인즉슨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이렇게 행동한다고 하는 어떠한 행동방식의 일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컨센서스(consensus, 일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판단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컨센서스를 그 시대의 윤리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막연히 ‘본능’이라고 규정하는 행동양식의 상당 부분이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나긴 가치의 축적에서 유래된다. 이드 속에 슈퍼 이고가 촉촉히 배어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문명에 사는 사람들의 윤리규범을 규정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책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효경』 일서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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