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효심
양주동이 왜 『부모은중경』을 가지고 노래를 지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조선후기부터 『부모은중경』이 대중에게 보편화되어, 누구나 그 가사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은중경』은 대부분이 정조 때 용주사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11세에 체험하였다. 그리고 과묵하고 시세를 외면한 듯한 현명한 행동거지로 위험에 대처하며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었다. 그리고 25세에 등극한다(1776). 정조는 등극한 후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고,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국가기풍을 진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우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호만 얻은 아버지를 장헌(莊獻) 세자라고 추존하였고 정조 13년(1789)에는 방치되었던 아버지의 묘를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새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실려있는 내용에 의하면, 정조는 우연한 기회에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이라는 승려를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정조에게 바치었다고 한다. 정조는 워낙 성리학에 해박하고 심오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기에 불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었고 탄압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은중경』을 읽자마자 마음에 크게 동하는 바가 있었다. 이에 보경 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보경은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珠寺都摠攝)을 겸직하게 되었고 『부모은중경』을 각(刻)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 경판(經板)을 용주사에 보관하게 하였다.
속설에 의하면 정조가 현륭원을 만들고,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여 수차례 능행(陵幸)을 하던 중, 지나는 길목에 작은 암자가 눈에 띄어 그 암자를 중창하고 내세에서의 부모님 명복을 빌기 위해 『부모은중경』을 목각하여 봉안토록 했다 하나,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용주사는 기존의 작은 사찰을 중창한 것이라기보다는 거의 새로운 창건이며, 시기적으로도 거의 현륭원의 묘역공사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용주사는 현륭원을 지키는 능침사찰(陵寢寺刹,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사찰)로 창건된 것이다. 용주사는 1794년 1월에 착공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된 수원화성과 행궁(行宮)보다도 훨씬 먼저 창건되었다.
1790년 2월 19일에 터를 닦는 불사를 기점으로 같은 해 9월 29일에는 대웅보전의 불상이 점안되었다고 하니【대웅보전 닫집 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에 의하면 10월 1일에 점안재(點眼齋) 거행】, 불과 7개월 만에 총 147칸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의 대가람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정조가 대규모의 인력을 투여하고 전국의 시주를 격려하여【보시금의 총액이 87,505냥으로 수원성 축조 금액의 10분의 1 정도】 거국적인 사업으로 자기 아버지 무덤의 재궁(齋宮)을 지은 것이다.
한마디만 역사적 사실을 첨기하면 용주사가 창건되기 전에는 이 곳에 성황산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는데 이 절은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廉居)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조선금석총람』에 실려있는 원주 「흥법사염거화상탑지(興法寺廉居和尙塔誌)」에 의하면 염거 화상이 입적한 해는 844년이다. 연대상의 착오가 있다】, 염거는 가지산문의 제2대 조사였다. 가지산문은 한국 선불교를 대표하는 선문이며 그 개산조가 선덕왕(宣德王) 5년(784)에 입당(入唐)하여,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정통제자인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의 서당지장대사(西堂智藏大師, 735~814), 그리고 마조 도일의 종풍을 진작시킨 또 하나의 입실제자인 백장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 749~814)에게 직접 남종선을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 도의(道義)였다. 염거는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도의에게 배웠고, 그 도통을 체징(體澄, 804~880)에게 물려주었는데, 체징은 전남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주석하면서 가지 산문의 제3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나 가지산문은 체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규모를 갖추고 선승을 배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체징이야말로 가지산문의 실제적 개창주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장흥 보림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이 바로 가지산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을 선사한 인물이 장흥 보림사의 보경(寶竟)이라는 스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시대적으로 1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격하고 있지만 장흥의 보림사와 화산의 갈양사는 우리나라 조계종의 가지산문이 개창될 때부터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고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천년을 지속하여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부모은중경」이야말로 가지산문이 인류사에 제시한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인도의 경전도 아니요, 중국의 경전도 아니다. 가지산문에서 나온 우리나라 토착경전인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주체적 학문적 성과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추론에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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