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치장(聖治章) 제십(第十)
인간의 본질을 따르는 정치
증자가 효치(孝治)의 위대함을 듣고 나서 여쭈어 말하였다. “감히 묻겠나이다. 성인의 덕성 중에서 효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첨가할 덕목이 없겠나이까?” 曾子曰: “敢問, 聖人之德, 亡以加於孝乎?” 공자께서 이에 답하여 말씀하시었다. “천지의 본성을 구현한 만물 중에서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는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 중에서 효보다 더 위대한 행동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또 그 효행(孝行) 중에서도 아버지를 존엄하게 모시는 것보다 더 위대한 효행은 없다. 그리고 아버지를 존엄하게 모시는 방식 중에서, 그 아버지를 하늘과 동등한 존재로서 짝지어 제사 지내는 것보다 더 존엄하게 아버지를 모시는 방식은 없다. 이 모든 위대함을 실천한 사람이 바로 주공(周公)이다. 子曰: “天地之性, 人爲貴. 人之行, 莫大於孝. 孝莫大於嚴父, 嚴父莫大於配天, 則周公其人也. 옛날에 주공께서는 주나라의 시조(始祖) 이며 땅(농경)의 신인 후직(后稷)을 남쪽 교외 원구(圓丘)에서 하늘과 동등한 존재로서 제사(郊祀: 교외에서 제사 지냄) 지내시었다. 그리고 또 당신의 아버지이며 주나라의 실제적 창업주이신 문왕(文王)을 하느님 상제(上帝)와 동등한 존재로서 명당(明堂)【흙을 높게 북돋아 놓은 그 위에 지은 고전(高殿)으로 오실(五室)이 있고 사방에 문이 있는 궁전】에서 종사(宗祀)【혈족(血族)의 본원을 제사 지냄: 앞의 교사(郊祀)와 대비된다】 지내시었다. 주공께서 이와 같이 조상과 아버지에 대하여 성심성의의 효행을 다하는 것을 보고, 사해(四海) 안의 모든 제후들이 각기 그들의 나라의 귀한 토산품 공물(貢物)을 바쳐 들고와서 제사를 도왔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리오? 대저 성인의 덕이 이러한 효에 더 가(加)할 것이 있겠느뇨? 昔者, 周公郊祀后稷以配天,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 是以四海之内, 各以其職來祭. 夫聖人之德, 又何以加於孝乎? 그러하므로 한 인간이 몸으로 친히 자식을 낳아 성심껏 그 자식을 기르고, 기름의 혜택을 받은 자식이 성장하여 다시 부모를 공양하는 것, 그것을 바로 부모를 존엄히 한다(엄嚴: 여기서는 동명사적 용법)라고 말한 것이다. 성인께서는 바로 이러한 존엄을 통하여 경(敬: Reverence)을 가르치고, 그 친함(親: 몸으로 서로 거리감 없이 느낌)을 통하여 애(愛: Love)를 가르친다. 앞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성인의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 정치(政治)는 엄형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스려진다. 왜 그러한가?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 의거한 바가 바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是故親生毓之, 以養父母曰嚴. 聖人因嚴以敎敬, 因親以敎愛. 聖人之敎, 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其所因者, 本也.” |
이 장 때문에 ‘효치(孝治)’라는 개념과 더불어 ‘성치(聖治)’라는 개념이 생겨났지만, ‘성치’는 단지 ‘성인지정 불엄이치(聖人之政, 不嚴而治)’라는 구절에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것이다. 성인의 치도(治道: 다스림의 길)는 궁극적으로 효도의 실현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장에 주공(周公)이 등장하기 때문에 유교의 종파적 제식주의의 갖가지 맥락에서 복잡한 해석이 이루어져 오히려 이 장의 의미가 난삽하게 곡해되었으나 주공은 단지 하나의 캐릭터로서 등장한 것이지, 그를 통하여 유교적 종법주의나 정통론을 주장하려 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정치를 행한 하나의 효(孝)의 패러곤(paragon, 본보기)일 뿐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장(士章)」에서 말한 아버지의 중요성이다. 여기 ‘아버지’라는 것은 라캉의 말대로, 권위를 대변하는 하나의 이름(nomina)이며 상징체(symbol)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존엄하게 한다는 것(엄부嚴父: ‘엄’이 타동사, ‘부’가 그 목적)이 곧 배천(配天)【하늘에 배향된다. 하늘과 동등한 존재로서 짝지어 모셔진다】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석(多夕)의 ‘효기독론(Xiao Christology)’이 결코 그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든가, 기묘한 언어사용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효경』의 충실한 해석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고한 존재가 천자(天子)나 왕(王)이나 지상의 최고의 통치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천자에게도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천자는 ‘천자(天子)’일 수 있는 것이다. 주공이 위대한 것은 바로 아버지와 사직의 신을 잘 제사 지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문왕(文王)이고 사직의 신은 시조신 후직(后稷)이다. 문왕은 정치적 창업자이며 구체적 인격체이다. 후직은 이미 추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후직을 배향할 때는 ‘배천(配天)’이라 했고 ‘교사(郊祀)’라고 했다. 문왕을 배향할 때는 ‘배상제(配上帝)’라 했고 ‘종사(宗祀)’라 했다. 우리가 ‘종묘사직’이라 할 때 문왕은 종묘라는 상징체에 해당되고, 후직은 사직이라는 상징체에 해당된다. ‘배천’의 ‘천(天)’ 땅에 배(配)하는 존재로서 추상화되어 있고, ‘배상제(配上帝)’의 ‘상제(上帝)’는 모든 조상신을 총괄하는 지고의 존재로서 인격화되어 있다.
문화적ㆍ경제적 | 권력적ㆍ정치적 |
추상적(abstract) | 인격적(personified) |
배천(配天) | 배상제(配上帝) |
교사(郊祀) | 종사(宗祀) |
사직 | 종묘 |
후직(后稷) | 문왕(文王) |
주공(周公)의 제사, 효(孝) |
청가정본(淸家正本)에는 ‘각이기직래제(各以其職來祭)’에서 ‘래’ 다음에 ‘조(助)’가 들어가 있는데, 나는 정본에 따라 ‘조제(助祭)’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직(職)’은 ‘공물(貢物)’을 뜻한다.
여기 맥락을 잘 살펴보면 『효경』의 일관된 주제가 드러나 있다. 그것은 효의 두 측면, 애(愛)와 경(敬)의 재천명이다. 애는 친(親)과 관련되어 있고 경은 엄(嚴)과 관련되어 있다.
땅적(Earthly) | 하늘적(Heavenly) |
여성적 측면(femininity) | 남성적 측면(masculinity) |
친(親) | 엄(嚴) |
애(愛) | 경(敬) |
효(孝) |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엄부(嚴父)와 배천(配天)의 구체적 이미지와 궁극적 의미를 한 인간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그 자신이 그 기름의 애경을 인식하여 다시 부모를 봉양하는 그 역사적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느님(天) 아버지(父)’를 말하게 되는 것은 우리 유한한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로 인하여 단절되지만, 그 단절의 연접성ㆍ연속성은 효(孝)로써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효의 궁극적 주체는 개개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효를 통섭하는 주체로서의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배천(配天)’, ‘배상제(配上帝)’하게 되는 이유이다.
효(孝) | |
배상제(配上帝) | 인간을 초월하는 보편자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엄케 함 |
배천(配天) | 하늘과 더블어 땅의 존재를 존엄케 함 |
생육(生毓) | 인간세의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 확보 |
엄부(嚴父) | 아버지를 존엄케 함 |
이런 의미에서 효는 철저히 인간의 덕성인 동시에 모든 종교성(religiosity)를 포괄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가능성이 이 효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효를 통한 성스러운 다스림[聖治]의 궁극적 소이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효경』을 관통하고 있는 ‘성인지교, 불숙이성(聖人之敎, 不肅而成)’, ‘성인지정, 불엄이치(聖人之政, 不嚴而治)’라는 말이다. 성치에는 교(敎)와 정(政)의 두 측면이 있으며, 교는 ‘불숙이성(不肅而成)’하고, 정은 ‘불엄이치(不嚴而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자들이 억지로 사회질서를 잡기 위하여, 검찰과 경찰을 동원하여 기껏해야 공안통치를 일삼는 사태를 목격할 때 우리는 이러한 『효경』의 언어가 오늘 여기에 절실한 이유를 감지한다.
무위지치(無爲之治) | |
비엄숙주의(non-authoritarian) | 비엄형주의(non-legalistic) |
불숙이성(不肅而成) | 불엄이치(不嚴而治) |
교(敎): 교화, 문화적 통치 | 정(政): 정령, 법제적 통치 |
성치(聖治) |
이것은 『효경』이 후기유가의 작품이며, 노장계열에서 제기한 강력한 유교의 도덕주의(moral rigorism)에 대한 비판을 극복하고서 ‘효’라는 개념을 확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숙이성, 불엄이치는 곧 도가의 자연주의를 충분히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성치장, 하나만 해도 제국의 통합을 앞둔 시점에서 유교적 사상가들의 생각을 총집결시킨 명문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의 결어는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성인의 다스림이 의거한 바는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其所因者, 本也.
정치는 사회적 제도의 조작이나 엄형ㆍ엄벌에 의한 권위나 협박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질로부터 자연스럽게 비조작적으로 형성되어 나가는 질서라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에 두었다는 의미에서 이 『효경』은 유교의 성경(바이블, Bible)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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