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명
나는 우가리트(Ugarit, Ras Shamra)의 고도시와 그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바알ㆍ다곤 신전을 바라보면서, 레바논산맥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의 거대한 분지 베카밸리에 우뚝 솟은 바알베크(Baalbek)의 압도적으로 웅장한 석조건축물을 쳐다보면서, 영험스러운 카디샤계곡(Qadisha Valley)의 신비로운 백향목 숲, 그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면서, 작열하는 시리아사막 한 가운데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캐러반의 오아시스 대도시 팔미라(Palmyra, Tadmur)의 화려한 테트라 필론과 육중한 바알신전의 위용에 압도되면서, 그리고 우르파ㆍ하란평야에 아직도 카스타 디바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듯 아련한 애수를 전하는 달의 신전(Temple of Sin)의 정적 아름다움을 흠상하면서 나는 사피르의 명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찌 바알은 나쁜 하나님이고, 야훼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규정성의 폭력이 가능한가? 무력적으로 나약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이스라엘민족이 생존의 안간힘으로 그러한 신화와 문학을 지어내는 것은 동정할 수 있으나 어찌 그러한 황당한 환상의 폭력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이 될 수 있는가? 더더욱 황당한 것은 그러한 종교적 폭력을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언어에까지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폭력적 규정은 인간의 사유에 대한 폭력적 규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피르가 말하는 원시언어(primitive languages)는 공간적인 사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간적인 사태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동시점 한공간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들이 다른 태고의 시간들을 전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나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의 언어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철학강의를 하고 있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언어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보편언어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한다. 이것은 결코 과언(誇言)이 아니다. 칸트의 구성설적 세계관의 핵심은 물론 시대정신이 다르다 할지라도 반구대의 예술가들에게도 궁극적으로 전달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제아무리 『존재와 시간(Sein and Zeit)』의 독일어 어휘의 조어방식이 현란하다 할지라도 하이데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본래적 자아의 회복의 테제는 아프리카의 부쉬맨들에게도 전달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보편철학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ㆍ서ㆍ고ㆍ금의 모든 문명의 편견으로부터, 그 가치의 폭력으로부터 해탈되지 않으면 편애(偏偏)한 인간존재 이해의 미로를 헤맬 뿐이다. 도무지 고전을 공부할 소이(所以)가 없어지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고도. 하란평원의 달의 신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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