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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인도유러피안 어군 속에는 ‘효’라는 개념이 없다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인도유러피안 어군 속에는 ‘효’라는 개념이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3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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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유러피안 어군 속에는 라는 개념이 없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효심이 사라지고 있다고들 말한다. 이대로 가면 효도나 효성은 우리사회에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운운, 과연 그럴까? 한국인의 가족관계와 서양인의 가족관계를 차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은 일차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불교가 아무리 불립문자를 이야기해도 인간 존재의 모든 규정성은 언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란 결코 서구언어학이나 철학이 말하는 어떤 추상적 논리나 감정이나 역사가 배제된 어떤 수학적 도상이 아니다. 말이란 존재의 역사이다. 말이란 단순히 의사전달을 위한 논리적 매개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역사성을 토탈하게 규정하는 논리 이상의 그 무엇이다. 말이 의사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나의 의사전달 방식을 말이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말을 습득하는 순간, 그 말이 소속된 문명의 전승체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유아라 할지라도 말을 습득하는 동시에 이미 고등한 문명의 전승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말의 일차적 기능은 개념의 외연이나 내연을 정확히 규정하거나 개념들간의 정밀한 연결방식을 습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의 습득과 더불어 체득되는 축적된 감성의 심미성 속으로 나의 존재양식이 확대되어 나가는 것이다. 나라는 상징체계는 내가 습득한 말로써 구성된다.

 

여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라는 말이 있는 한, 효라는 내 마음의 역사성은 소멸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라는 말이 어느 나라 언어에든지 그 상응되는 말이 있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우선 인도ㆍ유러피안 언어군 속에서 효에 해당되는 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어에서 단 하나의 개념화된 단어로써 효를 번역하기는 불가능하다. 보통 효를 필리알 파이어티(filial piety)’라고 번역하는데(James Legge), 이것도 벌써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고 의미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필리알(filial)’이라는 형용사는 아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필리우스(filius)에서 온 말이다. ‘아들이 부모에 대하여 지녀야 하는 경건성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앞서 비판한 복종주의적 도덕의 일방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매우 국부적인 뜻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파이어티(piety)’라는 말도 종교적 함의가 강하여 순수한 인간관계에 적용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 외로도 필리알 컨덕트(filial conduct, R. T. Ames, 자식다운 시행)’, ‘더 트리트먼트 어브 페어런츠’(the treatment of parents, Arthur Waley), ‘필리알 듀티’(filial duty) 등등의 번역이 있으나 효라는 하나의 포괄적 개념을 전달하기에는 너무도 조잡한 번역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언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마스터한 사계의 대가들의 번역이다.

 

가장 포괄적인 번역으로서 러브 비트윈 페어런츠 앤 칠드런(love between parents and children)’이라고 한다 해보자! 그러면 라는 개념의 특수한 느낌은 러브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보편적 패러다임 속으로 용해되어 버리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토록 기본적이고 단순한 라는 개념이 영어로써 표현할 길이 없다니!

 

학교스쿨(school)’로 상응시키는 데 우리가 별로 불편이나 어색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의 교육체제나 학교라는 개념을 둘러 싼 대중교육의 일반적 분위기나, 커리큘럼, 양식, 감정, 건물 등등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삶의 체험 속에서 거의 일치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 상응되는 스쿨이 있는 것처럼 당연히 효에 상응되는 서양말이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가 부서지는 당혹감에서 우리는 학교와 같이 물리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사태가 아닌 우리 삶의 양태가 얼마나 타문화권의 사람들과 다른 것인가, 그 총체적 역사성의 실상을 명료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사고의 개념지도가 다른 것이다. 문명의 양태나 삶의 전승의 갈래가 다른 것이다. 무수한 겁()을 통하여 알라야식(ālaya vijñāna)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들의 의미론적 결합양태가 다른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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