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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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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굽타 제국이 붕괴한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또 다시 인도의 고질병이 도졌다. 특별한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들이 공존하는 분열의 시대다. 다행스런 것은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강적이었던 흉노는 인도 남하를 포기하고 터키와 유럽으로 가버렸다. 비록 소국가들 간의 충돌과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세계 무대는 땅 밑에서 용암이 막 분출되려는 듯한 기세였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중세 사회가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대륙 북방의 몽골족이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사의 흐름은 13세기부터 시작되는 몽골의 세계 제국과 동서 교통, 유럽의 대항해시대라는 일련의 흐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사적 격변의 분위기는 인도에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장기간 이민족의 침입이 없었던 탓에, 굽타 제국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태평성대는 경제와 정치가 반비례하게 마련이다. 경제가 발달해 생활수준은 풍족해졌으나 정치조직은 거의 발전이 없었다. 당연히 통일 제국에 대한 염원은 굽타나 쿠샨 시대보다도 희박해졌다.

 

이 시대에 딱히 중심이 될 만한 세력을 꼽자면 라지푸트(Rajput)가 그 후보다. 이들은 원래 5~6세기경에 인더스 하류 지역으로 들어온 이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백 년이 지나면서 토착민과 뒤섞이고 인도 문화에 동화되어 실상 이민족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종족적으로 잡다해진 탓에 라지푸트는 하나로 통합되어 살아간 게 아니라 여러 소국가로 분열되어 서로 간에도 다툼이 잦았다. 하지만 이들은 때마침 찾아온 인도의 평화기에 북인도의 중심 세력으로 발돋움했으므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는 라지푸트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라비아 해상무역 원래 인도양은 아라비아 무역상들의 텃밭이었다. 그들은 위와 같은 목선을 타고 남인도와 지중해 세계를 연결해주었다. 그러나 남인도가 발달하면서 아라비아 무역상들은 점차 밀려나고, 남인도의 인도양 연안 국가들이 인도양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까지의 해상무역을 제패하게 되었다.

 

 

남인도 역시 여러 소국가가 분립된 형세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 중에서 촐라(Chola) 왕조는 주목할 만하다. 1세기경 조그만 부족으로 출발한 촐라는 굽타 제국이 북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했으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에는 여러 속국을 거느리면서 일약 남인도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특히 촐라의 걸출한 군주인 라젠드라 1(Rajiendra I, ?~1044)11세기 초반 데칸의 패자였던 찰루키아(Calukya)를 정복하고 중부 인도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에도 그는 북진을 계속해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 인도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이때가 굽타제국의 사무드라굽타 이래 두 번째 맞는 남북 인도의 대통합 기회였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통일 대신 라젠드라 1세는 해상 활동에 주력했다. 원래 남인도는 반도라는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남인도의 해상무역은 서쪽으로 아라비아와 지중해권, 동쪽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이르는 가히 세계적인 규모였다. 남인도의 무역상들은 이미 로마 제국 시대에 후추와 향료, 진주, 보석 등을 유럽에 수출했다(오늘날 인도에서는 당시 로마가 무역 대금으로 지불한 로마 금화들이 발견되고 있다). 4세기 중반에 남인도의 판디아(Pandya) 왕국은 당시 로마 황제인 율리아누스에게 사절을 파견한 일도 있었다.

 

8세기부터 서부의 말라바르 해안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에 종사했는데, 촐라 왕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남인도 무역을 독점했다. 이렇게 보면 라젠드라의 위업은 군주 개인의 공로라기보다 수백 년간 촐라 왕조가 무역에 기울인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라젠드라의 시대부터 유럽과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의 해상무역로는 촐라의 독차지가 되었다. 이때의 해상로는 이후 유럽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향료 시장과의 직거래에 나서면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 대항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상인들이 퍼뜨린 종교 이슬람교가 6세기에 생겨나 순식간에 세계종교로 성장한 과정은 세계사적인 수수께끼다.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라는 가르침 덕분일까? 아니면 아라비아에서 생겨나 서쪽으로 간 그리스도교와 인도에서 생겨나 동쪽으로 간 불교 사이의 종교적 공백을 잘 이용한 덕분일까? 이슬람교가 급속히 퍼진 데는 활발한 정복 전쟁도 큰 몫을 했지만, 아라비아 상인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예로부터 동서 교역에서 활약을 한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슬람교는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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