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평화와 안정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변화에 무뎌진다. 인도는 결국 오랜 기간 평화(아울러 정체)를 누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1세기부터 북인도에는 그전의 어느 이민족보다도 더 강하고 무자비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이슬람 세력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가즈니(Ghazni) 왕국의 마흐무드(Mahmud) 왕은 펀자브의 비옥한 영토를 노리고 북인도에 침입했다. 그는 재위 시절에 10여 차례나 인도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렵고도 끔찍한 원수였다. 오랜 평화에 나태해져 있던 인도군은 이슬람군의 빠른 기동력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에는 원래부터 양질의 말이 태부족이었고 인도군은 전통적으로 코끼리를 애용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기동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유서 깊은 인도의 불교 사원과 힌두 사원들이 이슬람군의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당시 사원들은 재물과 귀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적의 주요 표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의 군주들은 이슬람 문화가 아니면 모조리 파괴해야 할 불경스런 우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침략은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인도를 지배하려 한 게 아니라 단지 노략질을 했을 뿐이지만, 12세기 말부터 시작된 주제곡은 서곡과 분위기부터 크게 달랐다. 그 지휘자는 1150년 가즈니를 타도한 구르(Ghur) 왕조의 무이즈-웃-딘 무함마드(Muizz-ud-Din Muhammad)였다. 그는 마흐무드와 달리 인도를 완전히 정복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마흐무드가 처음 인도를 침략했을 때 이미 인도의 실력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무함마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자신감을 품을 만했다. 무함마드는 13세기 초반 마침내 라지푸트를 격파하고 북인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야망은 꿈으로 그쳤다. 제국을 건설하고 얼마 못 가 암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무함마드의 총애를 받으며 무장으로 활약하던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Quṭb - ud - Dῑn Aybak, ?~1210)가 술탄에 올랐다. 상관의 꿈은 그에게서 실현되었다. 아이바크는 델리를 수도로 삼고 정식으로 북인도를 지배하는 정복 국가를 선포했다. 그는 원래 궁정 노예 출신이었으므로 그가 세운 국가를 노예 왕조(1206~1290)라고 부른다. 한 왕조가 100년 가까이 존속한 것은 중세 후기 인도에서 기록적인 사건이다.
이후 노예 왕조는 터키계의 칼지(khalji)에 정복되었고, 칼지는 또 투글루크(Tughluq)에게 정복되었다. 이런 식으로 15세기 전반까지 200년 동안 북인도는 터키와 아프가니스탄 세력이 번갈아가면서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델리를 중심으로 했고, 예전처럼 소국가들이 분립한 시대와 달리 서로 같은 시대에 공존한 게 아니라 대체로 정복을 통해 맞교대했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총칭해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분열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일 국가가 지배한 시대라고 보기에도 어정쩡하다. 그래도 북인도의 패자가 된 델리 술탄국은 내친 김에 데칸과 남인도에까지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남인도의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가 사력을 다해 저지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이때 비자야나가라가 무너졌다면 인도는 일찌감치 전역이 이슬람권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인도까지 통합하지 못한 데다 라지푸트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소국가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델리 술탄국은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었을 뿐 제국과 같은 전일적인 지배를 관철한 것은 아니었다.
남인도는 힌두권으로 남았으나 북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 문제는 어땠을까? 그간 이민족의 침입은 많았어도 이번처럼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지고 들어온 이민족은 없었다. 불교가 인도를 떠난 굽타 시대부터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는 늘 힌두교였다. 평소에 이교도를 대하는 이슬람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교가 다를 때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슬람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전제정치를 행하지 않는가?
▲ 인도의 후추 인도 남부에서는 오래전부터 후추를 재배했으나 유럽인들은 당시 향료의 원산지를 그냥 인도라고만 알았을 뿐 정확한 위치를 몰라 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매우 비싼 값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4세기에 오스만튀르크가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하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한 탓에 향료의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아라비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오는 뱃길은 북이탈리아가 중개무역을 독점했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했다). 동방의 향료가 이탈리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서유럽의 실수요자에게 왔을 때는 원래 가격의 30배로 치솟았다. 그래서 대서양에 인접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들은 동양에 가기 위해 아프리카를 통째로 돌아가는 바닷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예상을 거스른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온 이민족 정권인지라 델리 술탄국의 나리들은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배층은 하나로 뭉쳐 인도를 지배하는 데 힘쓴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술탄들은 모두 전제 군주였으나 중국의 경우처럼 세습되지 않고 주로 무장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자고 나면 암살로 정권이 바뀌는 일도 대단히 흔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침입과 지배로 북인도는 수많은 문화재만 잃었을 뿐 정치나 행정의 쇄신은 거의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에 대한 통치도 상당히 느슨했다. 지배층이 이슬람인 만큼 피지배층에게도 서서히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지만 다수의 백성들이 개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소수의 이슬람교도를 위해 다수를 차별하기에는 권력의 짜임새가 부족했다. 따라서 정부가 비이슬람교도에게서 특별 세금을 징수하는 지즈야(Jizya, 일종의 인두세로 19세기까지도 존속했다)라는 제도를 시행한 것 이외에 별다른 종교적 차별을 하지는 않았다. 이슬람 교리도 이슬람 본토에서만큼 엄정하게 지켜지지는 않았고 힌두 고유의 전통이 강력히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율법에 순장(旬葬)의 풍습은 죄악이었지만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카스트 제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훗날 인도를 식민지로 경영하게 된 영국이 인도의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순장의 풍습은 법으로 금지되어 사라졌다. 그것은 근대 영국이 중세 이슬람보다 인도주의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8세기와 14세기의 시대적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도 카스트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오늘날 카스트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현실에서는 잔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이 델리 술탄국으로 인도를 처음 지배한 경험은 후대의 인도 역사에서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낳는다. 하나는 16세기에 강력한 무굴(Mughal) 제국이 들어선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드디어 인도는 이슬람 세력과 힌두 세력으로 아예 나라가 갈라진다는 사실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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