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②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예의 환관 정치에다 당쟁까지 겹쳐 정치의 실종에 한몫을 거들었다. 정치에 관해 무능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신종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붕당이 형성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정의 관료들은 이미 다섯 개의 붕당을 만들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된 계기가 생겨났다. 일찍이 당쟁이 극성을 부렸던 송대의 유학자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대도(大道)를 논하는 군자의 붕당과 눈앞의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의 붕당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인배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다투다가도 군자의 붕당이 출현하면 이에 대항하여 약삭빠르게 일치단결하는 생존의 본능을 보여준다. 그 다섯 개의 붕당이 공동의 적으로 삼은 ‘군자의 붕당’은 동림당(東林黨)이었다.
1594년 신종은 멀쩡한 맏아들이 있는데도 애첩의 소생을 마음에 두고 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었다【못난 아비와 잘난 아들은 어울리지 않지만 신종의 맏아들은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춘 잘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인물을 살리고 죽이는 것도 시대다. 그는 어렵사리 제위에 올랐다가 한 달도 못 되어 설사약을 잘못 먹고 죽었는데,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그는 태창(泰昌)이라는 연호와 광종(光宗)이라는 묘호만 역사에 남겼다. 그가 그렇게 급사한 탓에 그의 아들은 허겁지겁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런데 광종이 맏이이면서도 태자 책봉이 여의치 않았던 사정은 엉뚱하게도 조선 왕실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광해군은 차남으로서 세자 책봉을 받으려 했다가 태자 책봉을 놓고 당쟁을 벌이던 명 조정의 분위기 때문에 늦어졌다】. 강직한 관료였던 고헌성(顧憲成)은 이에 항의하다가 파직된 뒤 낙향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우고 학문과 시국에 관한 토론을 벌였는데, 여기에 기원을 둔 게 동림당이다. 재야의 동림당이 조정의 양식 있는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자 기존의 붕당들은 한데 뭉쳐 ‘비동림당’을 이루었다. 동림당과 비동림당은 이후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사사건건 대립했다.
당쟁 자체도 나빴지만 이 당쟁이 종식된 과정은 더 나빴다. 시정잡배 출신의 위충현(魏忠賢)은 “출세하려면 환관이 되어 황제의 눈에 들라.”는 원칙에 따라 환관이 된 인물이다. 광종의 아들인 ‘까막눈’ 황제 희종(熹宗, 1605~1627)의 신뢰를 얻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1626년 비동림파와 내통해 동림당의 여섯 거물을 처형하고 당쟁을 종식시켰다. 다음 황제이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은 즉위하자마자 위충현을 처형하고 동림당의 인물들을 등용해 꺼져가는 제국의 불씨를 되살리려 애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정치조직으로 변질된 서원 말뜻 그대로라면 서원(書院)은 공부하는 장소, 즉 학교여야 한다. 그러나 유학 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공부란 곧 정치였다. 그래서 조선 역사에는 학자 관료라는 독특한 계층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나 한반도에서나 원은 당쟁의 진원지였다. 사진은 당시 군자의 붕당이라 불렸던 동림당의 동림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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