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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태어남 -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태어남 -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건방진방랑자 2021. 6. 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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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면서부터다아리아인은 원래 언어학상의 용어로, 정식 명칭은 인도 유럽어족이다. 하지만 거기서 전성되어 인종적인 의미로도 사용하므로 종족의 이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아리아인을 인종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유명하다. 유럽으로 간 아리아인은 수천 년 뒤에 로마를 침공한 게르만족의 조상에 해당한다. 독일 민족 순혈주의에 빠진 히틀러는 고대 아리아인을 숭배하고 미화했다. 거기까지는 뭐라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유대인 학살은 명확한 인종주의적 범죄다. 혹시 그는 고대의 자기 조상들이 셈족에게 밀려났다고 여겨 역사적 복수를 시도한 걸까? 고대의 민족이동에서 아리아인은 인도를 정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대인의 조상인 셈족이 장악하고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피해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아리아인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인데, 기원전 18세기 ~ 기원전 17세기부터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동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의 기후가 변화하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환경이 달라지자 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인도까지 온 것이다.

 

아리아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이동했는데, 한 무리는 인도 방면으로 진출했고, 다른 무리는 서아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 지역으로 이동했다. 유럽으로 간 아리아인은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 증거는 인종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유럽 백인의 인종적 조상은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인이며,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는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인더스 문명의 목욕탕. 모헨조다(Mohenjo-Daro)로 유적의 목욕탕 부분이다. 당시의 목욕이란 오늘날처럼 생활 습관으로 한 게 아니라 제사장이 제사를 올리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한 행위였다. 제사장은 가운데 계단으로 내려와 수조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탕 벽면에 촘촘히 쌓아올린 벽돌들은 당시의 건축술이 3000년 뒤의 고대 로마에 못지않았음을 보여준다.

 

 

인더스 문명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아인은 문명보다 무력에서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정착 문명의 수준은 보잘것없었으나, 아리아인은 그 당시에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이라면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철기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것은 단기간에 작정하고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정착 생활을 했다. 여기서 농경 생활을 익힌 그들은 이윽고 유목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도 중부 지역과 동부 갠지스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당연히 원주민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원주민의 대표적인 부족은 드라비다인이었다. 그러나 양측의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오늘날의 서구인에게서 보듯이 우세한 체력 조건에다 철기를 지닌 막강한 유목민족 출신에게 작은 체구에 청동제 무기밖에 없는 농경민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을 정복하고서 함께 어울려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아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아예 제도로 확립했다. 그것이 바로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다.

 

 

 

 

바로 그 무렵 중국에 존재한 은나라는 제사를 받들 때 언제나 은 왕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변 부족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냈다. 또 은의 뒤를 이은 주나라는 이민족 오랑캐를 정복하고 나서도 제후 자신이 직접 제사장을 맡아 토착민의 신을 받드는 제사를 올렸다. 토착민의 지역신은 사()였고, 농업신은 직()이었다. 이것이 후일 합쳐져서 한 왕조를 가리키는 사직(社稷)이라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 왕들은 자기 조상을 받드는 종묘(宗廟)와 피정복민의 문화에서 비롯된 사직을 함께 지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이것이 곧 중화의 원리다).

 

그러나 아리아인은 피정복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카스트 제도로 노골적인 신분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인도는 단순한 신분제를 넘어 철저한 계급사회가 되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 카스트 제도가 오늘날까지도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스트는 모든 사람을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샤(vaiya), 수드라(Sudra)의 네 가지 계급으로 구분했다(반드시 네 가지만은 아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브라만을 제외한 모든 계급을 수드라로 구분하기도 했다). 최고 신분인 브라만은 사제 계급으로 종교의식을 담당했고, 크샤트리아는 귀족과 정치적 지배층, 군인 계급이었으며, 바이샤는 농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평민, 최하층 수드라는 노예 계급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 세 계급은 아리아인이었고, 원주민은 모조리 수드라였다. 즉 원주민의 최상층도 아리아인의 최하층만 못했으니 얼마나 철저한 차별 제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보편적 인권의 관념이 생겨난 근대 이전까지 모든 인류 사회는 신분제를 취했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카스트 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라면 당연히 정치와 군사의 지배층이 제1신분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최고 지배층은 사제 집단인 브라만이었고, 이들이 정치적 지배층인 크샤트리아를 통제했다. 이점은 고대 인도가 종교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고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인도에서 종교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아리아인의 이동 경로.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가 고향인 아리아인은 일찍부터 철제 무기를 가졌던 수수께끼의 민족이다.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남쪽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로 왔다. 서쪽으로 간 아리아인은 터키를 지난 다음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까지 남하해 그리스의 원주민들과 어울려 미케네 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 전 12세기에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도리스인도 아리아인의 후예일 것으로 추측된다. 까마득한 고대에도, 느리기는 하지만 대규모 민족이동이 있었고 동서 교류도 있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와 종교(불교 / 자이나교)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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