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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중국화의 물결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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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중국화의 물결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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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의 물결

 

 

703년의 수교는 바로 이 진짜 일본과 한반도의 단독정권 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아시아의 평화, 팍스 아시아나(Pax Asiana)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과연 중국은 모든 질서의 중심이었다. 중국이 안정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를 되찾았으니까. 신라와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와 문명의 중심인 당나라에 앞다투어 견당사(遣唐使)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당을 모방하기 시작했다(심지어 일본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서 계획도시를 새 수도로 꾸며 천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런 운동이 당풍(唐風)이라는 정식 명칭까지 얻었지만, 신라는 일본과 달리 당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모국화라고나 해야 할까?

 

모국화 드라이브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 ~ 765) 치세 때 절정에 달한다. 우선 그는 전통적인 신라식 이름으로 불리던 행정구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를테면 삽량주, 한산주, 웅천주, 무진주처럼 토속적인 지명을 양주, 한주, 웅주, 무주로 바꾼 것이다(그 가운데 상주와 전주는 오늘날까지도 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당시까지 전해지던 옛 지명들은 원래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에서 나온 이름을 음역 또는 훈역으로 한자화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웅천은 원래 곰나루였는데, 백제의 수도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어 웅진(은 곰이고 은 나루다)이 되었고 신문왕(神文王)이 그것을 다시 웅천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웅주가 되었으니 이미 지명의 기원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곧이어 경덕왕은 율령박사를 두어 중국식 율령을 시행하는 데 더욱 만전을 기했으며, 당의 중앙제도를 본받아 시랑과 낭중 등의 관제를 도입하고 당의 6부에 해당하는 기관을 설치했다.

 

경덕왕이 자신있고 소신있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신라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마치 소나기가 휩쓸고 간 뒤 새순이 돋는 것처럼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는 꿀맛 같은 휴식과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꽃피운 것도 이 시기다. 원효(元曉, 617 ~ 686)의 아들 설총(薛聰)이 이두를 총정리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게 무형문화재에 해당한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오늘날까지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형문화재다. 이 작품들을 기획한 김대성(金大城, ?~774)은 지금의 부총리급인 이찬까지 오른 인물로서, 공직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751년에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완공되지 못하고 이후에 국가에서 완성했는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오히려 불국사는 오늘날 수학여행지로 애용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신라 최대의 사찰은 단연 황룡사, 아마 김대성은 불국사를 황룡사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 신라의 대표적 사찰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을 것이다. 200년 전인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당시의 기술로 16년 만에 완성한 황룡사보다 더 긴 기간을 공사하고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게 그 증거다. 그러나 불국사의 운명을 위해서는 그게 다행이었다. 황룡사는 최대 사찰이었기 때문에 13세기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으니까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데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그는 전생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품삯일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흥륜사 스님에게서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밭을 절에 시주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그 뒤 그는 곧 죽었고 그의 벤처투자는 후생에 빛을 본다. 그 덕분에 김대성은 김문량이라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토함산의 동서 양편에 자리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의 위치로 미루어 다른 해석도 있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두 사찰의 엇갈린 운명 위는 불국사의 전경이고, 아래는 황룡사 목탑지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만 해도 황룡사는 동양 최대의 목탑을 자랑하며 웅장하게 서 있었겠지만 500년 뒤 몽골 침략 때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아마 김대성이 더 오래 살아 불국사를 직접 완공했더라면 황룡사보다 더 크게 짓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몽골군의 타깃이 되었을 테니 오히려 지금에는 불국사가 사라지고 황룡사만 남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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