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믿을 건 외교뿐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믿을 건 외교뿐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6:38
728x90
반응형

믿을 건 외교뿐

 

 

백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맹을 구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평생 씻지 못할 수모를 당한 아신왕(阿莘王)은 차라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처럼 전장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으니 광개토왕 앞에서 맹세한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백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도움을 얻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동쪽을 돌아보지만 비류왕(比流王) 시절에 느슨한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이미 고구려에게 붙어 있다.

 

고민하는 아신왕에게 유력한 동맹자로 중국의 동진이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동진과의 관계는 각별한 데가 있다. 379년에 할아버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이 처음 인사를 텄고 아버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때는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가 와서 백제에 처음으로 당대의 첨단 문명인 불교를 전했다. 이때가 384, 고구려보다 12년 늦었지만 고구려는 북중국의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한 데 비해 백제는 그와 별도로 남중국 동진의 불교를 수입한 만큼 고구려에 뒤질 게 없다. 더욱이 당시 극동의 불교는 호국불교였으므로 국가 종교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고구려에서나 백제에서나 불교가 처음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었던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다불교의 발생지는 인도였으나 기원전 2세기에 마우리아 제국이 붕괴한 이래 인도는 오히려 전통적인 힌두교로 복귀했고 불교는 동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런데 불교를 수용하는 데서도 그 전부터 정치적 편제가 확고한 동북아시아와 그렇지 못한 동남아시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소승불교 계열이 전래된 동남아시아에 비해 대승불교 계열에 속하는 극동의 불교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호국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호국불교 외에 밀교와 선불교의 계통도 전해졌으며, 이후에도 독자적인 종파가 생겨날 정도로 한반도에 비해서 훨씬 다양했다.

 

그러나 선진 문물까지는 수입할 수 있어도 동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당시 동진은 남중국에서도 이미 저물어가는 해였으며(동진은 420년에 멸망한다), 북중국의 강성한 오랑캐나라들에 비해 약해빠진 한족 왕조였으니 백제에게 당장 절실히 필요한 물리력의 도움을 얻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은 다른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인용

목차

연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