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낙점②
비보를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하루종일 망연자실해 있다가 이렇게 부르짖는다. “슬프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 백제의 윤충은 아마도 100년 전 성왕(聖王)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여겼겠지만 딸을 잃은 김춘추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나라 신라는 복수를 해줄 만한 힘이 없다. 사무치는 개인적 원한에다 국가적 과업을 덧붙여 그는 마침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과제, 어느 것이 그의 마음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했을까?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전자인 듯싶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일찍이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영토가 있으니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고구려에 달려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 ~ 668)에게 백제에 대한 원한과 험담을 늘어놓고 나서 백제 정벌을 부탁했으나 보장왕은 대뜸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면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김춘추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김춘추가 요구를 거부하자 보장왕은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리니 김춘추는 대박을 쫓다가 쪽박을 찬 셈이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목숨조차 위험했던 그를 구한 것은 처남인 김유신이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김유신이 1만의 결사대를 이끌고 북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보장왕은 김춘추를 돌려보낸다(당시 김춘추는 선도해先道解라는 고구려 관리가 말해준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龜兎之說]를 듣고 꾀를 써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거칠부도 고구려 승려를 스승으로 둔 것으로 미루어보면 신라에 우호적인 인물들이 고구려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첫 외교에서 실패한 김춘추,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건 아니다. 고구려에게서 기대할 게 없으니 이제 고민은 끝났다. 믿을 건 중국의 당나라뿐이다. 마침 그 이듬해 당에 갔다 온 사신의 보고는 그런 희망을 더욱 굳혀준다.
같은 시기에 삼국은 한반도 사태를 놓고 모두 당나라에게 지침을 구했다. 중국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다【당시 당 태종 이세민은 초기 권력의 불안정을 딛고 막 안정기로 접어든 상태였으므로 아마 한반도 사태에 직접 개입할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626년에 아버지 이연(李淵)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랐으니, 수 양제를 뺨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양제와 달리 병법과 무술만이 아니라 지도력과 판단력, 아울러 『진서(晉書)』의 일부마저 직접 집필할 만큼 학문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치세 23년간은 중국 역사에서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의 치(治)’라 불릴 만큼 번영기였으며, 그와 신하들이 나눈 정치문답은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으로 꾸며져 후대에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 참고서로 삼을 정도였다】. 즉 한반도 삼국은 서로 싸우지 말고 화평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당 태종의 충고는 15년 전 무왕(武王)과 진평왕(眞平王)의 ‘고소장’을 접수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쪽에 더 후한 점수를 매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찍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추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대중국 외교의 일선에 나설 차비를 차리고 있던 김춘추는 그런 눈치를 분명히 알아차린 듯하다. 그러나 그 참에 중국의 낙점을 확정지으려던 그는 예상보다 이른 당나라의 행동에 외교 행보를 잠시 늦춘다. 당 태종이 드디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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