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의 쟁패
비록 공식적인 출범으로는 후삼국의 막내격이 되었지만, 후삼국시대의 초기를 주도한 것은 궁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후고구려가 정복 국가에만 머문다면 오래 갈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궁예는 젊은 시절에 승려가 되어 선종이라는 법명까지 얻었다. 게다가 그는 미륵불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므로 마진이라는 국호는 불교 용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크다. 위대하다’는 뜻의 수식어인 마하(maha)라는 말은 보통 한자로 마하(摩訶)라고 표기되는데(물론 음역이다), 마진의 ‘마’는 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은 ‘진단(震旦)’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진단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인데, 원래는 동방이라는 뜻으로 고대 인도인들이 중국을 가리킬 때 사용한 말이지만 중국인들이 한반도를 말할 때도 쓰였다. 즉 마진은 ‘동방의 위대한 나라’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궁예가 이 작명을 위해 무척 신경쓴 흔적은 도참설(圖讖說)에서 신성시하는 갑자년(904년)을 기해 국호와 연호를 정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정한 다음 신라의 제도를 모방해서 각종 관제와 직제, 군제 등을 제정했다. 또 이듬해에는 도읍을 미리 봐둔 철원으로 옮겨 새 왕조의 번듯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게 장기적인 태세를 갖춘 것을 보면 아마 그는 후삼국이 대치하는 시대가 제법 오래 지속되리라고 여겼던 듯하다.
어차피 장기전이라면 굳이 서둘 필요가 없다. 궁예는 개인적인 원수이자 궁극적 목표인 신라를 먼저 공략하지 않고, 먼저 견훤과 예선전부터 착실히 치를 심산이다. 마침 견훤도 역시 901년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실패한 뒤(의자왕의 한을 풀겠다고 선언했으나 견훤은 의자왕처럼 대야성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타깃을 궁예로 바꾼 터였다. 두 나라가 볼 때 신라는 옥션(auction)도 못 되는 옵션(option)일 뿐이니까 여기서의 승자가 신라를 차지하게 될 것은 뻔하다.
양측이 크게 한판 붙은 것은 906년 상주에서다. 오리지널 백제와 고구려도 그랬지만 부활한 두 나라의 힘도 역시 고구려가 한 수 위였다. 이 전투에서 궁예는 완승을 거두었고, 여세를 몰아 910년에는 이십대의 청년으로 성장한 왕건을 보내 금성(나주)을 차지하고 남서해의 해상까지 장악했다. 사실 이때 후삼국시대는 끝날 수도 있었다. 신라는 간신히 상주 이남만 방어하고 있었고(효공왕은 모든 성들에 전투할 생각은 말고 수비만 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후백제는 지금의 전라북도로 축소되었으니 두 나라 모두 궁예의 왕국 내에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궁예는 그때 삼국을 재통일하지 않았을까? 상대방을 모두 외통수에 몰아놓고도 왜 게임을 끝내지 않았을까? 오히려 그는 911년에 마치 자신의 작명 솜씨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해괴한 것으로 바꾸는 등 호들갑을 떤다. 꼼짝 못하게 된 토끼를 앞에 둔 호랑이의 여유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두 아들에게도 보살의 칭호를 내린 것을 보면, 그는 좋게 말해 몽상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치광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왕명으로 편찬한 책이니 당연히 궁예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다.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그런 궁예의 행동은 아마 장차 통일 왕조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한 예행 연습이었던 듯하다. 904년부터 918년까지 연호를 무려 세 차례나 바꾼 것(무태 → 성책 → 수덕만세 → 정개)이나, 대대적인 궁성 축조 사업을 벌인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그는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는 건데, 그 근거는 뭘까?
이 시점에서 앞에 말한 신라의 왕통이 갑자기 박씨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는 그 과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700여 년 만에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에는 혹시 궁예가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낳은 김씨 왕실에 대한 적대감, 후삼국을 통일해서 통일 왕조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 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궁예는 신라의 왕위계승을 비트는 데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서도 견훤의 명맥을 조이지 않은 것은 마침 그때 신라에 대한 공작으로 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박씨인 신덕왕의 재위 시절에 신라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을 뿐 태봉과는 전혀 마찰이 없었다. 바로 전 효공왕(孝恭王) 시절에 궁예의 군대가 신라의 북변을 공략한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여러 가지 사실에서 궁예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박씨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조종했을 정황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새 왕실을 손에 넣은 그가 승리를 낙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바깥의 쿠데타를 조종하고 성공시킨 그는 정작 자신이 내부 쿠데타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918년 어느 날 밤 궁예의 측근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남몰래 왕건의 처소를 찾는다. 그들의 뜻은 궁예의 무도한 처사를 두고 볼 수 없으니 대의를 위해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왕건은 망설인다. 모험을 통해 일인자를 꿈꿀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지만 영원한 이인자를 택할 것인가? 때는 두 번 오지 않는다는 네 사람의 설득도 집요했지만, 왕건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하늘의 뜻이 당신에게 왔다면서 갑옷을 내미는 아내였다. 그날 밤으로 왕건은 궁성 앞에 나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얻었고,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궁예는 변장하고 달아났다가 얼마 후 백성들에게 맞아죽고 말았다.
결국 궁예는 통일로 가는 도로만 닦았을 뿐이고 정작 그 길을 신나게 달린 사람은 왕건이었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 것 이외에는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만큼 궁예가 닦아놓은 ‘통일고속도로’는 왕건에게 아주 유용했다. 궁예의 전략에서 왕건이 수정한 것은 다만 속도를 늦춘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앞에 두고서도 신중하기 그지없는 그는 궁예의 압박 전술을 버리고 신라, 후백제와 삼각구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점에서 장기전에 실제로 대비한 것은 궁예라기보다 왕건이다.
▲ 미륵의 힘 아무리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라고 해도 승려의 신분으로 정식 정치인이 되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궁예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륵 신앙의 덕분이다(그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미륵은 곧 미래의 불교이므로 기존 불교의 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진은 금산사의 미륵불인데, 공교롭게도 금산사는 견훤의 근거지에 있었고 나중에 견훤이 유폐되는 곳이다.
아마 왕건이 페이스를 늦춘 이유는 그동안 궁예의 카리스마로 유지되어 온 고려를 일순간에 자신의 스타일로 개조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도읍을 즉각 옮기지 않고 2년 뒤인 920년에야 송악으로 옮긴 데서도 그의 침착함을 엿볼 수 있다). 신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므로 자중하는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기회로 견훤의 숨통이 트였다는 데 있다. 견훤으로서는 강적인 궁예가 죽은 데다 왕건이 해빙 노선으로 바꾸었으니 사태의 반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는 왕건이 집권하자 즉각 사신을 보내 축하한다. 그러나 그 사신은 외교적 제스처를 위해 파견되었을 뿐이고 실상 견훤이 더 애타게 귀국을 기다린 사신은 같은 시기에 중국으로 보낸 사신이다. 과연 남중국의 오월에 파견된 사신은 오월의 왕이 견훤에게 내주는 중대부라는 관직을 선물로 가지고 돌아온다.
궁예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군주였다면 견훤은 외교적 감각이 뛰어난 재치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궁예보다 한발 앞서 백제의 부활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궁예가 대내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애쓸 무렵 국제적인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견훤으로서는 고려와 맞서기보다 신라를 차지하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의 전통적 스폰서인 중국을 구워삶아야 하는데, 중국의 승인을 얻는다면 중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최소한 중립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한반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후백제는 지리적으로도 중국에 가까울뿐더러 중국이 분열시대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유리한 여건이다【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뒤부터 960년 송(宋)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중국은 예전의 남북조시대처럼 화북과 강남으로 나뉘어 북중국은 다섯 개의 이민족 왕조(5대)가 교대로 장악하며, 남중국과 변방에는 10개의 나라(10국)가 분립하게 된다(그래서 ‘5대 10국 시대’다). 오월은 바로 그 10국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의 전통적인 스폰서였던 당나라가 사라지자 한반도의 후삼국은 대중국 관계에서 동등한 자격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중국과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거칠게 말하면 먼저 손을 잡는 게 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그러한 국제적 감각에서 가장 앞섰던 것이다】.
궁예가 상주 전투 이후 고삐를 늦춘 것은 견훤에게 회복의 계기를 주었고, 궁예를 대체한 왕건이 페이스를 늦춘 것은 견훤에게 역전의 계기를 주었다. 이제 바람의 방향은 후백제 쪽으로 바뀌었다. 천명을 받았다고 여긴 견훤은 대권후보로 나설 차비를 갖춘다. 중국이 후백제를 승인했다는 것은 곧 신라를 마음대로 요리해도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신라의 박씨 왕실이 이미 고려의 파트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궁예가 본의 아니게 왕건에게 물려준 가장 중요한 선물이 920년에 드디어 개봉된다. 신라 왕실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요청한 것이다(왕건이 집권하고 2년 뒤에 선물이 개봉된 이유는 왕건의 쿠데타로 박씨 왕실과 왕건의 관계가 새로 설정되어야 했기 때문일 터이다), 비록 신라가 후백제의 공략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지만 궁예가 주물러놓지 않았더라면 그렇듯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더욱이 국력으로 보면 후삼국 최강은 단연 고려였으므로 신라가 고려에 손을 내민다면 사실상 나라를 내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신라가 고려 측으로 붙는다는 게 상식적인 일이었을까? 궁예의 공작은 결정적인 때 왕건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삼국의 정세는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며 바야흐로 고비를 향해 치닫는다. 처음에는 후백제나 고려(후고구려)나 같은 ‘반란군’의 처지였기에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암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 했다. 그러다가 906년부터 910년까지는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크게 압박하면서 우위를 점했다. 곧이어 고려는 신라에 괴뢰정권(박씨 왕실)을 수립하고 후백제를 고립시켰으며, 그 휴지기를 이용해서 후백제는 몸을 추슬렀고 중국 외교에서 선수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친고려 노선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 시대가 오리지널 삼국시대와 가장 닮은 부분은 바로 이 장면이다. 옛 백제가 그랬듯이 후백제는 신라만을 타깃으로 할 뿐 고려와는 적대시할 의도가 없다. 또한 신라 역시 백제가 부활하는 것만이 두려울 뿐 고려에 대해서는 전혀 거부감이 없다.
따라서 신라가 고려에 접근하자 급해진 것은 견훤이다. 손 안에 잡힐 듯한 토끼가 또 한 발자국 달아나려 한다. 이 참에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다면 게임은 끝이다. 게다가 924년 신라는 중국 5대의 한 나라인 후당(後唐)에 조공을 보내 다시금 대중국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그 공조 체제마저 복원된다면 견훤의 모든 작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신라를 복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이듬해에 신라를 공략해서 20개 성을 빼앗고 재빨리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의 번신(藩臣)을 자처하며 절도사의 관직을 받아낸다【물론 통일제국이 못 되는 후당이었으니 견훤의 작위는 명예직일 뿐이고, 그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앞서 오월은 남중국의 왕조였지만 후당은 화북의 왕조였으므로 후당의 승인은 한 급이 높은 것이었다(남북조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듯이, 중국 역사에서는 늘 경제적 중심이 강남이고 정치적 중심은 화북이다).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도 한반도 왕조들을 거느리는 것은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분열기의 중국 왕조들은 한반도 왕조들이 보내는 구애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당은 924년에 진주에서 딴 살림을 차린 신라 장군 왕봉규에게도 절도사의 직함을 내주었다】.
전쟁과 외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견훤의 노련함에 왕건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옛 고구려처럼 두 나라의 분쟁을 조정할 힘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견훤과 볼모를 주고받으며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 924~927)이 항의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당시 경애왕은 왕건에게 “견훤은 거짓이 많으니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백제는 거짓이 많아 함께하기 어렵다던 신라 왕실의 전통적인 백제관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결국 왕건의 이런 모호하고 자신없는 태도는 견훤에게 기회를 주었다. 지금 신라를 공격한다면 왕건은 손을 쓰지 못하리라. 과연 그의 판단은 옳았다.
927년 견훤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느닷없이 신라의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오로지 왕건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경애왕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포석정에서 질탕하게 놀고 있던 참이었다. 손쉽게 왕궁을 접수한 견훤은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를 내주었으며, 후궁 한구석으로 달아나 숨은 경애왕을 찾아내서 다시는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못하게 했다(핍박해서 자결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으로 일단 신라는 멸망한 것이지만 고려가 있는 한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합병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신라 지역을 맡아 관리할 대리인으로 김부(金傅)라는 자를 세우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될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다【견훤은 경순왕을 권지국사(權知國事), 즉 ‘나라일을 맡은 대리인’이라는 신분으로 책봉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경순왕은 정식 왕이 아니다(오늘날 도지사道知事라는 직함에서도 보듯이 권지국사의 知란 ‘맡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는 55대 경애왕이 죽은 927년에 멸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권지국사란 원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기 전에 임시로 왕의 일을 맡는다는 뜻에서 생겨난 직함이다. 따라서 비정통적인 왕위 승계가 이루어졌을 때 이 직함이 사용되는데, 왕건도 처음에는 권지국사였고,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성계나 중종, 선조(宣祖) 등 정상적인 계통을 밟지 않은 왕들이 초기에 권지국사의 칭호를 썼다. 연호와 더불어 한반도 왕조들이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경순왕의 성이 김씨라는 점이다. 그는 경애왕의 외척 아우뻘이 되지만, 견훤이 굳이 김씨를 대리인으로 발탁한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박씨 세력이 왕건과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신라 궁성을 유린하는 작전에서 견훤은 김씨 세력의 내응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당시 견훤은 지금의 경북 영천을 공격하다가 경주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왕궁에까지 진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영천에서 경주까지는 무려 백리 길이다. 아무리 신라의 국력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신라 영토 안에서 먼 길을 달려와 가장 경비가 삼엄한 왕궁을 제 집 드나들듯 마음대로 유린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 게다가 아무리 경애왕이 신통치 못한 인물이었다 해도 저승사자 같은 견훤이 궁성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듯 태평하게 포석정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후백제군의 기습이 가능했던 데는 필경 박씨 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긴 김씨 세력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 놀이터에서 죽은 왕 신라 왕실의 놀이터였던 포석정이다. 경애왕이 여기서 술잔을 띄우며 놀고 있을 무렵 견훤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이로써 3대 15년에 걸쳐 잠깐 경주를 지배했던 박씨 정권은 끝나고 다시 김씨 정권이 들어선다. 그래봤자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사직이 끝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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