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왕실의 진통
만주에서 발해가 전성기의 마지막 단꿈에 취한 나머지 랴오둥 진출의 찬스를 놓치고 있을 무렵 한반도의 신라에게는 아예 아무런 찬스도 없었다. 중국이 힘을 잃자 신라는 마치 부모를 여린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崔致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신라는 경주 귀족들이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단계였으므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7세기 초반 두 여왕의 시대 이래 200여 년 만에 다시 여왕이 즉위하게 된 사정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00년 전의 두 여왕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해도 신라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로 기능했지만, 887년에 진성여왕이 즉위한 것은 순전한 비정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발단은 861년 경문왕이 사위로서 즉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전까지 80년 동안 원성왕(元聖王)의 후손들이 이어 오던 신라의 왕통이 다시 한번 뒤틀린 것이니 귀족들의 엉덩이가 가벼워지지 않을 수 없다. 사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곧 경주 귀족들 중 누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하긴, 근친혼으로 얽혀 있었으니 누구나 ‘누군가의 사위’ 다). 경문왕(景文王)의 치세 15년 동안 연이어 굵직굵직한 반란이 잇달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단 그의 두 아들이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과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으로 왕위를 이어 새로운 왕계가 자리잡는 듯했으나 정강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은 다시 귀족들을 들뜨게 만들기에 족했다. 그래서 정강왕은 재위 2년째인 887년에 병으로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 누이의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ㆍ진덕의 고사를 좇아 왕위를 잇게 하라.” 그의 누이가 바로 진성여왕이다.
얼핏 들으면 정강왕의 유언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200년 전 두 여왕이 나라를 맡아 무난하게 다스린 전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유언이 불과 16년 전 그의 외할아버지인 헌안왕의 유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시 헌안왕은 사위인 경문왕(景文王)을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비록 고사에 선덕ㆍ진덕 두 여왕의 사례가 있으나 이는 본받을 일이 못 되니 사위가 후사를 잇도록 하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해법은 물론 표현까지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왕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말해준다. 정강왕은 어떻게든 아버지 경문왕으로부터 비롯된 왕실의 새 혈통(즉 원성왕 계열이 아닌 혈통)을 끊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경주 귀족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고 있었던 당시 사정을 반영한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 2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렸어도 나라는 튼튼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역사서에는 여왕이 즉위 초부터 삼촌인 김위홍(金魏弘)과 놀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고립무원인 그녀로서는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근친혼 시대에 삼촌과 조카의 사랑은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왕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그 전부터 두 조카(헌강왕과 정강왕)를 충실히 보좌했던 김위홍은 사실상 진성여왕에게서 국정을 위임받고 왕처럼 군림했다. 승려인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공동 편찬한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듯 싶다【『삼대목』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888년에 편찬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노래집이다(‘삼대’란 신라의 상대ㆍ중대ㆍ하대를 뜻한다). 현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25편이 고작인데, 아마 『삼대목』이 전해졌더라면 수백 편의 각종 향가들을 통해 신라의 사회와 문화는 물론 우리의 옛말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지금은 오히려 8세기경에 간행된 일본 최초의 노래집 『만엽집(萬葉集)』을 통해 우리 고대어를 연구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렵에 흘러간 옛노래와 최신곡들을 문헌으로 집대성한 이유는 뭘까? 거기서도 역시 ‘흔들리는 중국’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도 9세기부터 당풍에서 국풍으로 문화의 조류가 바뀐 것을 보면 신라에서도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중국이 흔들릴 때마다 고유의 것을 찾는 주체적 풍조가 유행하는데, 이를테면 원나라가 약화된 고려 말과 중국 대륙에 청나라가 들어선 조선 후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삼대목』을 마지막 업적으로 남기고 김위홍이 죽은 것은 진성여왕에게 무엇보다도 큰 상실이었다. 삼촌이자 내연의 남편이자 의지할 버팀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만사에 의욕을 잃은 것은 당연하다. 궁중에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음행을 즐긴 것은 그런 후유증이었다. 어렵사리 정신을 차리고 최치원(崔致遠)의 시국 수습책을 받아들였으나 여왕을 우습게 본 귀족들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진성여왕은 아들도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 정강왕이 언젠가, 어디선가 낳아둔 서자를 받아들여 태자로 삼고 재위 10년 만에 죽는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비정상적인 여왕의 치세가 끝나고 897년에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하지만, 신라는 이제 왕실만이 아니라 전국이 비정상이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사실상의 왕처럼 군림한다. 오죽하면 효공왕(孝恭王)은 이런 편지를 당 나라에 보냈을까? “지금 전국은 모두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어찌해서 하늘의 재앙은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 것입니까?” 물론 당나라의 조정도 마찬가지 처지였으니 해동에만 재앙이 깃든 것은 아니지만, 효공왕은 그렇게나마 참담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푸념은 푸념일 뿐이고 당장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시급한 일은 경주 귀족들을 무마하는 일, 그래서 그는 모든 중앙 관리를 일계급 특진시킨다. 하지만 진성여왕을 농락한 경주 귀족들이 궁궐 바깥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졸지에 왕이 된 효공왕을 충심으로 대해줄 리는 만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16년이나 왕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효공왕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죽자 귀족들이 다음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놀랍게도 박경휘(朴景暉)라는 사람이다. 그가 신라의 53대 왕인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박씨가 왕이 되다니 대체 웬일일까? 가장 최근의 박씨 왕은 무려 700년 전의 아달라왕이었고, 4세기의 내물왕(奈勿王) 이래 신라 왕계는 김씨만으로 이어져왔으니 박씨는 그동안 신라 왕계와는 전혀 무관한 성씨다(실제로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왕실에 득시글거리는 수많은 김서방들을 두고 박서방을 추대할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아마도 그 진통은 왕실 내의 박씨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912년부터 15년 동안 박씨는 삼대(신덕왕- 경명왕 - 경애왕)에 걸쳐 신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박씨의 집권이 쿠데타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곧 밝혀진다.
▲ 난세의 향락 대내외적으로 난세였던 헌강왕 시절 경주의 분위기는 번영의 끝물을 말해주듯이 질탕한 향락이었다. 아마 처용은 당시에 꽤나 인기있는 난봉꾼이었던 듯하다. 그가 남긴 신라 최후의 향가인 「처용가(處容歌)」는 흥청망청하는 서라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삼대목』이 편찬된 것도 향락의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그림은 당시에 유행하던 댄스인 처용무인데, 조선시대 왕실 연회에서 공연되는 모습이다.
다시 분열의 시대로
효공왕(孝恭王)이 불명확한 태생과 불안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국의 상황이 어수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왕권을 노리던 경주 귀족들은 효공왕(孝恭王)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왕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라가 없다면 왕권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나라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시작은 진성여왕이 김위홍을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889년에 전국적으로 터져나온 반란이었다. 반란이야 9세기 초부터 늘상 있어오던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반란은 색다르다. 그 전까지의 무수한 반란은 거의 대부분 중앙 관직을 가진 경주 귀족들이 왕권을 노리고 일으킨 것이거나 최소한 지방에 파견된 귀족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중앙과 무관한 지방에서, 그것도 고위 관리가 아닌 자들이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중앙정부의 과세 정책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니 무엇보다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이번 반란은 오래 갈 조짐이다.
반란의 불꽃은 먼저 상주에서 일어났으나 곧이어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반란이 원주에서 일어난다. 그 반란의 두목은 양길(梁吉)이라는 자인데, 그의 휘하에는 궁예(弓裔, ?~918)【일설에 따르면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景文王)의 서자라고 한다. 아마 그 자신이 부하들에게 그렇게 말한 듯한데, 만약 헌안왕의 아들이라면 헌안왕이 누이인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의도적으로 아들 궁예를 버렸다는 뜻이 된다. 스토리인즉슨 이렇다. 그의 아버지 ― 헌안왕이든 경문왕이든 ― 는 그가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점쟁이에게서 듣고 그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궁에서 일하던 여자가 그를 몰래 빼돌려 키웠다. 그 과정에서 궁예는 한 눈을 잃게 되었다.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권력을 잡은 뒤 궁예가 신라를 멸도(滅都, 멸해야 할 곳)라고 부르며 신라에서 오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린 것은 그런 사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탁월한 무장이 있었다. 891년 궁예는 양길의 명으로 강릉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2년 뒤에는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를 휩쓸어, 두목에게 반란군의 수령이 아니라 일국의 왕에 가까운 지위를 선물한다. 양길이 왕의 꿈을 부풀린 시기는 아주 짧았다. 궁예의 세력이 커짐을 경계한 그는 899년 휘하 군사를 이끌고 궁예를 처단하려 했다가 오히려 패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궁예는 양길의 부하들과 군대까지 받아들여 일약 한반도 중부의 패자로 발돋움했다. 이제 궁예는 사실상의 왕, 따라서 신라를 섬기던 지방 수령들도 줄줄이 그의 휘하로 들어온다(신라는 원래 ‘경주 정권’에 불과했음을 상기하라)그러나 궁예는 895년에 그에게 충성을 다짐한 왕융(王隆)이라는 자만은 부하로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왕융의 아들은 나중에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왕건(王建, 877~943)이기 때문이다.
▲ 경주 정권의 한계 궁예가 첫 도읍지로 정한 오늘날 철원의 그림이다. 이것으로 궁예는 반란군의 수괴에서 일약 일국의 왕으로 출세했는데, 이렇듯 중부 지방에서 쉽게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신라가 전국적인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경주 정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곧이어 견훤이 전주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한반도 중부를 잃으면서 이제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었다. 아직 만주에 발해가 존속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남북국시대가 아니라 ‘남중북국시대’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신라는 이미 남부에서마저도 주인이 아니었다. 양길이 봉기한 이듬해 이번에는 전주에서 견훤(甄萱, 867?~936)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장군이 된 그는 한반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주(지금의 광주)까지 손에 넣어 호남 전역을 지배한다(이 지역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장보고가 지배했던 곳이었으니 견훤은 아마 그 덕을 봤으리라). 옛 백제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백제의 화려한 옛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900년에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의자왕(義慈王)의 원한을 풀겠다’면서 후백제의 왕을 자칭한다. 그 소식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그 이듬해에 송악(지금의 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수복하겠다”고 선언하며 고려 왕을 자칭한다(중국 측 사서에는 옛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후(後)’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아마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를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들을 오리지널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前, 後, 東, 西, 南, 北 등의 글자들을 붙인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마침 한반도에 후삼국시대가 전개될 무렵 중국에서도 옛 왕조의 부활이 줄을 잇게 되는데, 예컨대 화북에서 연달아 정권교체를 했던 5대 왕조, 즉 양(梁) - 당(唐) - 진(晉) - 한(漢) - 주(周)는 역사에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명칭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가 부활했다. 비록 300년 전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으나 다시 찾아온 삼국시대, 이것을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졸지에 한반도의 단독정권에서 또 다시 삼국의 하나로 전락한 신라는 오리지널 삼국시대 때도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후삼국시대에서도 약소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효공왕(孝恭王)은 비록 예상치 못한 왕위를 얻었고 예상치 못하게 오래 재위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부활한 백제와 고구려에게 몹시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치세에는 동아시아의 커다란 격변이 일어난다. 907년 중국의 당나라가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일이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데, 이제 그 기둥이 내려앉았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후삼국의 쟁패
비록 공식적인 출범으로는 후삼국의 막내격이 되었지만, 후삼국시대의 초기를 주도한 것은 궁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후고구려가 정복 국가에만 머문다면 오래 갈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궁예는 젊은 시절에 승려가 되어 선종이라는 법명까지 얻었다. 게다가 그는 미륵불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므로 마진이라는 국호는 불교 용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크다. 위대하다’는 뜻의 수식어인 마하(maha)라는 말은 보통 한자로 마하(摩訶)라고 표기되는데(물론 음역이다), 마진의 ‘마’는 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은 ‘진단(震旦)’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진단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인데, 원래는 동방이라는 뜻으로 고대 인도인들이 중국을 가리킬 때 사용한 말이지만 중국인들이 한반도를 말할 때도 쓰였다. 즉 마진은 ‘동방의 위대한 나라’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궁예가 이 작명을 위해 무척 신경쓴 흔적은 도참설(圖讖說)에서 신성시하는 갑자년(904년)을 기해 국호와 연호를 정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정한 다음 신라의 제도를 모방해서 각종 관제와 직제, 군제 등을 제정했다. 또 이듬해에는 도읍을 미리 봐둔 철원으로 옮겨 새 왕조의 번듯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게 장기적인 태세를 갖춘 것을 보면 아마 그는 후삼국이 대치하는 시대가 제법 오래 지속되리라고 여겼던 듯하다.
어차피 장기전이라면 굳이 서둘 필요가 없다. 궁예는 개인적인 원수이자 궁극적 목표인 신라를 먼저 공략하지 않고, 먼저 견훤과 예선전부터 착실히 치를 심산이다. 마침 견훤도 역시 901년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실패한 뒤(의자왕의 한을 풀겠다고 선언했으나 견훤은 의자왕처럼 대야성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타깃을 궁예로 바꾼 터였다. 두 나라가 볼 때 신라는 옥션(auction)도 못 되는 옵션(option)일 뿐이니까 여기서의 승자가 신라를 차지하게 될 것은 뻔하다.
양측이 크게 한판 붙은 것은 906년 상주에서다. 오리지널 백제와 고구려도 그랬지만 부활한 두 나라의 힘도 역시 고구려가 한 수 위였다. 이 전투에서 궁예는 완승을 거두었고, 여세를 몰아 910년에는 이십대의 청년으로 성장한 왕건을 보내 금성(나주)을 차지하고 남서해의 해상까지 장악했다. 사실 이때 후삼국시대는 끝날 수도 있었다. 신라는 간신히 상주 이남만 방어하고 있었고(효공왕은 모든 성들에 전투할 생각은 말고 수비만 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후백제는 지금의 전라북도로 축소되었으니 두 나라 모두 궁예의 왕국 내에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궁예는 그때 삼국을 재통일하지 않았을까? 상대방을 모두 외통수에 몰아놓고도 왜 게임을 끝내지 않았을까? 오히려 그는 911년에 마치 자신의 작명 솜씨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해괴한 것으로 바꾸는 등 호들갑을 떤다. 꼼짝 못하게 된 토끼를 앞에 둔 호랑이의 여유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두 아들에게도 보살의 칭호를 내린 것을 보면, 그는 좋게 말해 몽상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치광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왕명으로 편찬한 책이니 당연히 궁예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다.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그런 궁예의 행동은 아마 장차 통일 왕조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한 예행 연습이었던 듯하다. 904년부터 918년까지 연호를 무려 세 차례나 바꾼 것(무태 → 성책 → 수덕만세 → 정개)이나, 대대적인 궁성 축조 사업을 벌인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그는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는 건데, 그 근거는 뭘까?
이 시점에서 앞에 말한 신라의 왕통이 갑자기 박씨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는 그 과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700여 년 만에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에는 혹시 궁예가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낳은 김씨 왕실에 대한 적대감, 후삼국을 통일해서 통일 왕조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 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궁예는 신라의 왕위계승을 비트는 데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서도 견훤의 명맥을 조이지 않은 것은 마침 그때 신라에 대한 공작으로 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박씨인 신덕왕의 재위 시절에 신라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을 뿐 태봉과는 전혀 마찰이 없었다. 바로 전 효공왕(孝恭王) 시절에 궁예의 군대가 신라의 북변을 공략한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여러 가지 사실에서 궁예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박씨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조종했을 정황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새 왕실을 손에 넣은 그가 승리를 낙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바깥의 쿠데타를 조종하고 성공시킨 그는 정작 자신이 내부 쿠데타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918년 어느 날 밤 궁예의 측근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남몰래 왕건의 처소를 찾는다. 그들의 뜻은 궁예의 무도한 처사를 두고 볼 수 없으니 대의를 위해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왕건은 망설인다. 모험을 통해 일인자를 꿈꿀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지만 영원한 이인자를 택할 것인가? 때는 두 번 오지 않는다는 네 사람의 설득도 집요했지만, 왕건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하늘의 뜻이 당신에게 왔다면서 갑옷을 내미는 아내였다. 그날 밤으로 왕건은 궁성 앞에 나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얻었고,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궁예는 변장하고 달아났다가 얼마 후 백성들에게 맞아죽고 말았다.
결국 궁예는 통일로 가는 도로만 닦았을 뿐이고 정작 그 길을 신나게 달린 사람은 왕건이었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 것 이외에는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만큼 궁예가 닦아놓은 ‘통일고속도로’는 왕건에게 아주 유용했다. 궁예의 전략에서 왕건이 수정한 것은 다만 속도를 늦춘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앞에 두고서도 신중하기 그지없는 그는 궁예의 압박 전술을 버리고 신라, 후백제와 삼각구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점에서 장기전에 실제로 대비한 것은 궁예라기보다 왕건이다.
▲ 미륵의 힘 아무리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라고 해도 승려의 신분으로 정식 정치인이 되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궁예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륵 신앙의 덕분이다(그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미륵은 곧 미래의 불교이므로 기존 불교의 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진은 금산사의 미륵불인데, 공교롭게도 금산사는 견훤의 근거지에 있었고 나중에 견훤이 유폐되는 곳이다.
아마 왕건이 페이스를 늦춘 이유는 그동안 궁예의 카리스마로 유지되어 온 고려를 일순간에 자신의 스타일로 개조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도읍을 즉각 옮기지 않고 2년 뒤인 920년에야 송악으로 옮긴 데서도 그의 침착함을 엿볼 수 있다). 신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므로 자중하는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기회로 견훤의 숨통이 트였다는 데 있다. 견훤으로서는 강적인 궁예가 죽은 데다 왕건이 해빙 노선으로 바꾸었으니 사태의 반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는 왕건이 집권하자 즉각 사신을 보내 축하한다. 그러나 그 사신은 외교적 제스처를 위해 파견되었을 뿐이고 실상 견훤이 더 애타게 귀국을 기다린 사신은 같은 시기에 중국으로 보낸 사신이다. 과연 남중국의 오월에 파견된 사신은 오월의 왕이 견훤에게 내주는 중대부라는 관직을 선물로 가지고 돌아온다.
궁예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군주였다면 견훤은 외교적 감각이 뛰어난 재치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는 궁예보다 한발 앞서 백제의 부활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궁예가 대내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애쓸 무렵 국제적인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견훤으로서는 고려와 맞서기보다 신라를 차지하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의 전통적 스폰서인 중국을 구워삶아야 하는데, 중국의 승인을 얻는다면 중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최소한 중립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한반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후백제는 지리적으로도 중국에 가까울뿐더러 중국이 분열시대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유리한 여건이다【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뒤부터 960년 송(宋)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중국은 예전의 남북조시대처럼 화북과 강남으로 나뉘어 북중국은 다섯 개의 이민족 왕조(5대)가 교대로 장악하며, 남중국과 변방에는 10개의 나라(10국)가 분립하게 된다(그래서 ‘5대 10국 시대’다). 오월은 바로 그 10국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의 전통적인 스폰서였던 당나라가 사라지자 한반도의 후삼국은 대중국 관계에서 동등한 자격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중국과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거칠게 말하면 먼저 손을 잡는 게 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그러한 국제적 감각에서 가장 앞섰던 것이다】.
궁예가 상주 전투 이후 고삐를 늦춘 것은 견훤에게 회복의 계기를 주었고, 궁예를 대체한 왕건이 페이스를 늦춘 것은 견훤에게 역전의 계기를 주었다. 이제 바람의 방향은 후백제 쪽으로 바뀌었다. 천명을 받았다고 여긴 견훤은 대권후보로 나설 차비를 갖춘다. 중국이 후백제를 승인했다는 것은 곧 신라를 마음대로 요리해도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신라의 박씨 왕실이 이미 고려의 파트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궁예가 본의 아니게 왕건에게 물려준 가장 중요한 선물이 920년에 드디어 개봉된다. 신라 왕실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요청한 것이다(왕건이 집권하고 2년 뒤에 선물이 개봉된 이유는 왕건의 쿠데타로 박씨 왕실과 왕건의 관계가 새로 설정되어야 했기 때문일 터이다), 비록 신라가 후백제의 공략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지만 궁예가 주물러놓지 않았더라면 그렇듯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더욱이 국력으로 보면 후삼국 최강은 단연 고려였으므로 신라가 고려에 손을 내민다면 사실상 나라를 내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신라가 고려 측으로 붙는다는 게 상식적인 일이었을까? 궁예의 공작은 결정적인 때 왕건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삼국의 정세는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며 바야흐로 고비를 향해 치닫는다. 처음에는 후백제나 고려(후고구려)나 같은 ‘반란군’의 처지였기에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암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 했다. 그러다가 906년부터 910년까지는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크게 압박하면서 우위를 점했다. 곧이어 고려는 신라에 괴뢰정권(박씨 왕실)을 수립하고 후백제를 고립시켰으며, 그 휴지기를 이용해서 후백제는 몸을 추슬렀고 중국 외교에서 선수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친고려 노선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 시대가 오리지널 삼국시대와 가장 닮은 부분은 바로 이 장면이다. 옛 백제가 그랬듯이 후백제는 신라만을 타깃으로 할 뿐 고려와는 적대시할 의도가 없다. 또한 신라 역시 백제가 부활하는 것만이 두려울 뿐 고려에 대해서는 전혀 거부감이 없다.
따라서 신라가 고려에 접근하자 급해진 것은 견훤이다. 손 안에 잡힐 듯한 토끼가 또 한 발자국 달아나려 한다. 이 참에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다면 게임은 끝이다. 게다가 924년 신라는 중국 5대의 한 나라인 후당(後唐)에 조공을 보내 다시금 대중국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그 공조 체제마저 복원된다면 견훤의 모든 작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신라를 복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이듬해에 신라를 공략해서 20개 성을 빼앗고 재빨리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의 번신(藩臣)을 자처하며 절도사의 관직을 받아낸다【물론 통일제국이 못 되는 후당이었으니 견훤의 작위는 명예직일 뿐이고, 그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앞서 오월은 남중국의 왕조였지만 후당은 화북의 왕조였으므로 후당의 승인은 한 급이 높은 것이었다(남북조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듯이, 중국 역사에서는 늘 경제적 중심이 강남이고 정치적 중심은 화북이다).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도 한반도 왕조들을 거느리는 것은 제국의 위신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분열기의 중국 왕조들은 한반도 왕조들이 보내는 구애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당은 924년에 진주에서 딴 살림을 차린 신라 장군 왕봉규에게도 절도사의 직함을 내주었다】.
전쟁과 외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견훤의 노련함에 왕건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옛 고구려처럼 두 나라의 분쟁을 조정할 힘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견훤과 볼모를 주고받으며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 924~927)이 항의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당시 경애왕은 왕건에게 “견훤은 거짓이 많으니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백제는 거짓이 많아 함께하기 어렵다던 신라 왕실의 전통적인 백제관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결국 왕건의 이런 모호하고 자신없는 태도는 견훤에게 기회를 주었다. 지금 신라를 공격한다면 왕건은 손을 쓰지 못하리라. 과연 그의 판단은 옳았다.
927년 견훤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느닷없이 신라의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오로지 왕건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경애왕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포석정에서 질탕하게 놀고 있던 참이었다. 손쉽게 왕궁을 접수한 견훤은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를 내주었으며, 후궁 한구석으로 달아나 숨은 경애왕을 찾아내서 다시는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못하게 했다(핍박해서 자결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으로 일단 신라는 멸망한 것이지만 고려가 있는 한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합병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신라 지역을 맡아 관리할 대리인으로 김부(金傅)라는 자를 세우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될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다【견훤은 경순왕을 권지국사(權知國事), 즉 ‘나라일을 맡은 대리인’이라는 신분으로 책봉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경순왕은 정식 왕이 아니다(오늘날 도지사道知事라는 직함에서도 보듯이 권지국사의 知란 ‘맡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는 55대 경애왕이 죽은 927년에 멸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권지국사란 원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기 전에 임시로 왕의 일을 맡는다는 뜻에서 생겨난 직함이다. 따라서 비정통적인 왕위 승계가 이루어졌을 때 이 직함이 사용되는데, 왕건도 처음에는 권지국사였고,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성계나 중종, 선조(宣祖) 등 정상적인 계통을 밟지 않은 왕들이 초기에 권지국사의 칭호를 썼다. 연호와 더불어 한반도 왕조들이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경순왕의 성이 김씨라는 점이다. 그는 경애왕의 외척 아우뻘이 되지만, 견훤이 굳이 김씨를 대리인으로 발탁한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박씨 세력이 왕건과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신라 궁성을 유린하는 작전에서 견훤은 김씨 세력의 내응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당시 견훤은 지금의 경북 영천을 공격하다가 경주까지 단숨에 진군하여 왕궁에까지 진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영천에서 경주까지는 무려 백리 길이다. 아무리 신라의 국력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신라 영토 안에서 먼 길을 달려와 가장 경비가 삼엄한 왕궁을 제 집 드나들듯 마음대로 유린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 게다가 아무리 경애왕이 신통치 못한 인물이었다 해도 저승사자 같은 견훤이 궁성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듯 태평하게 포석정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후백제군의 기습이 가능했던 데는 필경 박씨 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긴 김씨 세력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 놀이터에서 죽은 왕 신라 왕실의 놀이터였던 포석정이다. 경애왕이 여기서 술잔을 띄우며 놀고 있을 무렵 견훤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이로써 3대 15년에 걸쳐 잠깐 경주를 지배했던 박씨 정권은 끝나고 다시 김씨 정권이 들어선다. 그래봤자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사직이 끝났지만.
러키보이 왕건
이제 신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후삼국시대는 후백제와 고려가 대립하는 이국 시대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후 견훤은 신라 지역에 성들을 쌓으면서 신라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경순왕(敬順王) 김부 역시 견훤을 맹렬히 비난하던 경애왕과는 달리, 자신을 권지국사로 봉해준 견훤을 상왕(上王)으로 받들면서 왕건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 한다. 그러나 비록 견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다 해도 왕실을 유린하고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견훤에게 진심 어린 복종심이 우러나올 수는 없다. 따라서 경순왕은 여러 가지로 착잡한 심정이다.
그러나 왕건의 심정은 착잡을 넘어 참담하다. 어느새 이 지경이 되었을까? 눈치빠른 호족들은 벌써 대세를 좇아 견훤에게 투항하기 시작한다. 신중하기 그지없던 그였으나 이제 더 이상 신중할 수만은 없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모든 면에서 견훤을 앞서고 있어 궁예의 자취만 지우면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신라에 정변이 일어난 뒤 지금은 단 한 가지 면, 즉 군사력에서만 앞서고 있다.
다행스런 점은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격변기에는 뭐니뭐니해도 힘이 최고니까. 마침내 왕건은 힘으로 승부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권을 가져다준 것은 힘보다는 행운이었다. 대세를 장악한 견훤이 그 뒤 연이어 악수를 두면서 순식간에 자멸했기 때문이다.
사실 견훤의 신라 정복은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었다. 삼킬 수 없으면 입에 넣지 말아야 한다. 김부를 권지국사로 임명한 데서 보듯, 견훤은 신라를 멸망시키고도 그 영토를 직접 차지할 능력이 없었다(왕실만 손에 넣었을 뿐 아직 경주 귀족들을 아우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왕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그는 어떻게든 신라를 완전히 정복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경순왕(敬順王)을 세운 후 전주로 돌아간 것은 중대한 판단미스였다. 그로서는 경주가 정복지라기보다 적지(敵地)라는 느낌이 강했겠지만,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각오를 하더라도 그는 경주에 머물렀어야 했다. 정복자가 떠난 마당에 신라가 계속 정복지로 있을 리는 만무했다. 바로 이 점이 곧이어 벌어진 안동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신라를 복속시킨 뒤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재미를 본 견훤은 929년 7월 안동에서 고려군과 크게 한판 붙었다가 대패하고 만다(바로 몇 개월 전의 전투에서 왕건은 믿었던 의성 성주 홍술이 전사하자 ‘두손을 잃었다’면서 슬퍼했으니 안동 전투의 대승은 다분히 왕건에게 행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8천 명이 전사하는 참극을 당한 바로 이튿날 견훤은 나머지 병력을 모아 안동 부근의 순주성(順州城)을 함락 시켰다. 충분히 역전의 계기로 만들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그는 거기에 계속 주둔하지 않고 성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로 도망치는 데 급급할 뿐이다. 아마 그의 간이 작은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때까지 신라 지역에 자신의 근거지라 할 만한 곳을 만들지 못한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신라의 왕실을 정복한 성과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견훤은 자멸의 길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안동 전투는 왕건에게 예기치 않은 부수입을 가져다줬다. 경순왕(敬順王)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김씨 쿠데타를 지원한 견훤과 그 김씨 왕실을 다시 핍박하는 견훤, 두 명의 견훤 사이에서 갈등하던 경순왕은 마침내 노선을 정했다. 이듬해인 930년 경순왕은 경주 인근까지 찾아온 왕건을 직접 만나 “부모를 대하는 것 같다”며 충성을 다짐한다(경순왕의 출생연도는 전하지 않지만 979년까지 산 것으로 미루어 왕건보다 한 세대쯤 아래였을 것이다).
어차피 사실상 멸망한 나라의 왕실이었으니 그 자체로는 별 영양가가 없다. 그러나 왕건이 신라 왕실을 얻은 것은 고려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중국의 왕조들은 여전히 신라를 한반도의 적자로 보고 있었다. 932년 경순왕(敬順王)은 즉위한 뒤 처음으로 후당의 황제 명종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데, 아마도 사신의 행낭 속에는 왕건과 고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 이듬해인 933년 왕건은 드디어 바라던 후당의 책봉을 얻어낸다.
이제 왕건은 대권후보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선 가장 중요한 군사력에서 최강일 뿐 아니라 안 취약했던 외교에서도 큰 결실을 얻었다. 내에서는 신라의 충성을 서약받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화북 왕조의 승인을 받았다. 분위기가 반전되자 오히려 견훤의 휘하에 있는 호족들이 왕건에게로 줄을 서기 시작한다. 그 무렵 왕건은 이제야 후삼국시대의 종점이 보이는구나 싶은 기분이었을 법하다. 하지만 대세는 장악했으나 상황이 종료되려면 꽤나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 신라를 합병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후백제의 근거지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은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이미 그때까지의 행운만으로도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라 불릴 만한 왕건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935년 3월 후백제의 왕실에서 쿠데타가 터지면서 견훤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밀려나 실각한 것이다. 게다가 견훤은 3개월간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것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순식간에 걷혀 버렸다. 누구보다 견훤을 두려워했던 경순왕(敬順王)은 이제 거칠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해를 넘기지 않고 그 해 11월에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다. 이것이 공식적인 신라의 멸망이다.
옛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는 전쟁으로 멸망한 게 아니므로 부흥운동 같은 건 없다. 비록 경순왕의 맏아들은 어떻게 천 년 사직을 그리 쉽게 넘겨줄 수 있느냐고 항의하지만, 그것은 뜻하지 않게 왕위 계승권을 잃은 자의 당연한 반발일 뿐이니 부흥운동으로 조직화될 수는 없었다【금강산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살았다고 해서 그는 훗날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불렸는데, 그가 실제로 태자 책봉을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태자 책봉에 관한 기록이 매번 전하지는 않으나, 아마 그는 아버지 경순왕(敬順王)이 재위하던 시절에 태자로 정식 책봉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경순왕은 불과 9년 동안 재위했고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도 나이가 비교적 젊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마의태자의 나이는 필경 십대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주변 사정이 어지럽고 신라의 국세가 약해진 상황에서 경순왕이 태자 책봉에까지 신경쓸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견훤에게서 권지국사라는 굴욕적인 직함을 받은 경순왕은 애초부터 신라의 사직이 자신에게서 끝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왕건이 이빨 빠진 후백제의 마지막 명맥을 조르는 데는 더 이상 행운 따위도 필요없었다. 견훤은 칠십 노구임에도 불효 아들을 응징하는 데 함께 하겠노라고 소매를 걷어붙였고, 신검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견훤의 사위 박영규(朴英規)는 남몰래 왕건에게 접촉해서 투항할 뜻을 비쳤다. 936년 가을 왕건은 마지막 전투를 위해 무려 10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 신검이 주둔하고 있는 선산으로 갔는데, 그건 동네 싸움에 탱크를 몰고 간 격이었다. 별다른 접전 한 번 없이 후백제의 잔당이 항복하면서 러키보이 왕건은 삼국통일을 이루고,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한반도 단독 왕조시대를 열었다.
▲ 통일 기념 사찰 고려와 신라를 거저 줍다시피 한 러키보이 왕건이 그나마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은 후백제밖에 없다(그것도 견훤이 항복함으로써 쉬워졌지만). 그래서 그는 후백제를 접수한 그 해에 논산에 개태사라는 절을 지어 통일을 축하했다. 워낙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으니 대표 삼아 부처님에게 보답하려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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