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왕실의 진통
만주에서 발해가 전성기의 마지막 단꿈에 취한 나머지 랴오둥 진출의 찬스를 놓치고 있을 무렵 한반도의 신라에게는 아예 아무런 찬스도 없었다. 중국이 힘을 잃자 신라는 마치 부모를 여린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崔致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신라는 경주 귀족들이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단계였으므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7세기 초반 두 여왕의 시대 이래 200여 년 만에 다시 여왕이 즉위하게 된 사정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00년 전의 두 여왕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해도 신라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로 기능했지만, 887년에 진성여왕이 즉위한 것은 순전한 비정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발단은 861년 경문왕이 사위로서 즉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전까지 80년 동안 원성왕(元聖王)의 후손들이 이어 오던 신라의 왕통이 다시 한번 뒤틀린 것이니 귀족들의 엉덩이가 가벼워지지 않을 수 없다. 사위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곧 경주 귀족들 중 누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하긴, 근친혼으로 얽혀 있었으니 누구나 ‘누군가의 사위’ 다). 경문왕(景文王)의 치세 15년 동안 연이어 굵직굵직한 반란이 잇달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단 그의 두 아들이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과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으로 왕위를 이어 새로운 왕계가 자리잡는 듯했으나 정강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은 다시 귀족들을 들뜨게 만들기에 족했다. 그래서 정강왕은 재위 2년째인 887년에 병으로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 누이의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ㆍ진덕의 고사를 좇아 왕위를 잇게 하라.” 그의 누이가 바로 진성여왕이다.
얼핏 들으면 정강왕의 유언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200년 전 두 여왕이 나라를 맡아 무난하게 다스린 전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유언이 불과 16년 전 그의 외할아버지인 헌안왕의 유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시 헌안왕은 사위인 경문왕(景文王)을 후계자로 지목하면서 “비록 고사에 선덕ㆍ진덕 두 여왕의 사례가 있으나 이는 본받을 일이 못 되니 사위가 후사를 잇도록 하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해법은 물론 표현까지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왕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말해준다. 정강왕은 어떻게든 아버지 경문왕으로부터 비롯된 왕실의 새 혈통(즉 원성왕 계열이 아닌 혈통)을 끊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경주 귀족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고 있었던 당시 사정을 반영한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 2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렸어도 나라는 튼튼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역사서에는 여왕이 즉위 초부터 삼촌인 김위홍(金魏弘)과 놀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고립무원인 그녀로서는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근친혼 시대에 삼촌과 조카의 사랑은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왕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그 전부터 두 조카(헌강왕과 정강왕)를 충실히 보좌했던 김위홍은 사실상 진성여왕에게서 국정을 위임받고 왕처럼 군림했다. 승려인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공동 편찬한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듯 싶다【『삼대목』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888년에 편찬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노래집이다(‘삼대’란 신라의 상대ㆍ중대ㆍ하대를 뜻한다). 현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25편이 고작인데, 아마 『삼대목』이 전해졌더라면 수백 편의 각종 향가들을 통해 신라의 사회와 문화는 물론 우리의 옛말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지금은 오히려 8세기경에 간행된 일본 최초의 노래집 『만엽집(萬葉集)』을 통해 우리 고대어를 연구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렵에 흘러간 옛노래와 최신곡들을 문헌으로 집대성한 이유는 뭘까? 거기서도 역시 ‘흔들리는 중국’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도 9세기부터 당풍에서 국풍으로 문화의 조류가 바뀐 것을 보면 신라에서도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중국이 흔들릴 때마다 고유의 것을 찾는 주체적 풍조가 유행하는데, 이를테면 원나라가 약화된 고려 말과 중국 대륙에 청나라가 들어선 조선 후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삼대목』을 마지막 업적으로 남기고 김위홍이 죽은 것은 진성여왕에게 무엇보다도 큰 상실이었다. 삼촌이자 내연의 남편이자 의지할 버팀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만사에 의욕을 잃은 것은 당연하다. 궁중에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음행을 즐긴 것은 그런 후유증이었다. 어렵사리 정신을 차리고 최치원(崔致遠)의 시국 수습책을 받아들였으나 여왕을 우습게 본 귀족들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진성여왕은 아들도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 정강왕이 언젠가, 어디선가 낳아둔 서자를 받아들여 태자로 삼고 재위 10년 만에 죽는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비정상적인 여왕의 치세가 끝나고 897년에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하지만, 신라는 이제 왕실만이 아니라 전국이 비정상이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사실상의 왕처럼 군림한다. 오죽하면 효공왕(孝恭王)은 이런 편지를 당 나라에 보냈을까? “지금 전국은 모두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어찌해서 하늘의 재앙은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 것입니까?” 물론 당나라의 조정도 마찬가지 처지였으니 해동에만 재앙이 깃든 것은 아니지만, 효공왕은 그렇게나마 참담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푸념은 푸념일 뿐이고 당장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시급한 일은 경주 귀족들을 무마하는 일, 그래서 그는 모든 중앙 관리를 일계급 특진시킨다. 하지만 진성여왕을 농락한 경주 귀족들이 궁궐 바깥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졸지에 왕이 된 효공왕을 충심으로 대해줄 리는 만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16년이나 왕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효공왕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죽자 귀족들이 다음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놀랍게도 박경휘(朴景暉)라는 사람이다. 그가 신라의 53대 왕인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박씨가 왕이 되다니 대체 웬일일까? 가장 최근의 박씨 왕은 무려 700년 전의 아달라왕이었고, 4세기의 내물왕(奈勿王) 이래 신라 왕계는 김씨만으로 이어져왔으니 박씨는 그동안 신라 왕계와는 전혀 무관한 성씨다(실제로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왕실에 득시글거리는 수많은 김서방들을 두고 박서방을 추대할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아마도 그 진통은 왕실 내의 박씨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912년부터 15년 동안 박씨는 삼대(신덕왕- 경명왕 - 경애왕)에 걸쳐 신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박씨의 집권이 쿠데타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곧 밝혀진다.
▲ 난세의 향락 대내외적으로 난세였던 헌강왕 시절 경주의 분위기는 번영의 끝물을 말해주듯이 질탕한 향락이었다. 아마 처용은 당시에 꽤나 인기있는 난봉꾼이었던 듯하다. 그가 남긴 신라 최후의 향가인 「처용가(處容歌)」는 흥청망청하는 서라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삼대목』이 편찬된 것도 향락의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그림은 당시에 유행하던 댄스인 처용무인데, 조선시대 왕실 연회에서 공연되는 모습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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