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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통혼)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통혼)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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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

 

 

무혈 쿠데타로 고려를 세웠고, 평화롭게 신라 정권을 인수했으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후백제마저 접수해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은 정말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그러나 역시 공짜란 없는 걸까? 두꺼비한테도 헌 집을 줘야 새 집을 얻을 수 있듯이 대개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허무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됐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건국자 왕건은 죽을 때까지 승자의 행복한 삶을 누렸지만 그가 생전에 심어놓은 모순의 씨앗 때문에 이후 고려는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진통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이다. 이제 고려는 한반도의 통일왕조가 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니 웬 말일까? 이 모순은 아직 후삼국시대가 한창이던 고려 건국 시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삼국이 대치한 형국이 옛 삼국시대와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후삼국 시대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이 시대는 오리지널 삼국시대와 무관하다. 우선 신라만 해도 7세기의 젊고 패기에 찬 왕국이 아니었고, 후백제와 고려는 이름만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했을 뿐 영토와 주민, 또는 왕실의 혈통으로 봐도 옛 두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견훤이 의자왕(義慈王)의 한을 풀겠다고 외친 것이나, 궁예가 고구려의 수도를 되찾겠다고 부르짖은 것은 처음부터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들이 그런 제스처를 취한 이유는 뭘까? 일단 신분상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견훤은 하급 무관 출신이고 궁예는 비록 왕의 서자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주장일 뿐 공인된 사실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 봉기했을 당시 그들이 거느린 군대는 도적떼나 다름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봉기에 성공하고 지역의 패자로 떠오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기세를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하려면 아무래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럴 때 화려했던 옛 왕조들의 이름은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구호를 외치는 자가 있다면 듣는 자도 있을 것이다. 견훤과 궁예는 누굴 향해 구호를 외쳤을까? 백성들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직 서양에서조차 일반 시민의 시대가 도래하려면 60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구호의 대상은 호족들이다. 대권후보로 나선 견훤과 궁예에게 대권을 안겨다 줄 유권자는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통일신라시대 내내 중앙정부는 경주 인근에만 지배력을 행사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종의 지방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국이 단일한 권력 하에 편제되어 있었지만, 각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호족들이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과 사병 조직까지 거느리고 토지제도, 조세제도, 군사제도, 관리 임용제도 등에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지지를 얻으면 그들이 지닌 영토와 주민, 군대를 모조리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보다 확실한 유권자가 아닌가?

 

왕건이 견훤과 궁예보다 앞선 점은 유권자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그는 카리스마의 허와 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궁예의 성장과 몰락에서 보듯이 잘 쓰면 약이 되지만 한 번만 삐끗해도 독이 되는 게 카리스마다. 어차피 권위에서는 궁예를 능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왕건은 휘하의 호족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 차라리 그들을 회유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단을 구사했다. 사실 그가 즉위한 918년에 이미 측근들이 두 차례의 반역 음모를 꾸민 일이 있었으니 그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즉위한 뒤 곧바로 호족들에게 일일이 사신을 보내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辭, 호족들을 후히 대우하고 자신은 낮춘다)의 저자세를 취했다. 935년 자신에게 투항해 온 견훤을 상부(上父)라고 부르며 받든 것은 그런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다(견훤은 그보다 불과 열 살 정도 위였으니 왕건의 저자세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칫 호족들이 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해지는데, 일단 그가 생각한 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其人)제도다. 그러나 지방 관리가 아닌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볼모 삼아 억류하는 것이므로 상수리보다는 강력하지만, 그것으로 호족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더 안전한 통제 메커니즘이 필요한데, 여기서 왕건은 아주 대단히 효과적인 방안을 구상해낸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과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면 된다.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논외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부인 스물셋)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왕건은 정주(개성 부근), 나주, 충주, 황주 등 신라 지역을 제외한 전국 요처를 지배하는 호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신라를 접수한 뒤에는 경순왕(敬順王)의 사촌누이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이 지역에도 튼튼한 혈연의 뿌리를 내렸다. 또한 경순왕에게는 사심관(事審官)이라는 직책을 내려 경주 지역을 관장하게 하는데, 이렇게 지역의 우두머리를 중앙에서 임명하는 제도는 나중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마땅히 시집보낼 딸이 없는 호족 가문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집안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걱정할 건 없다. 어쨌거나 가족으로 만들면 되니까. 왕건은 통혼으로 직접 연결할 수 없는 호족 가문(주로 세력이 작은 호족)에게는 자신의 성인 왕씨를 하사해서 어거지로라도 친족관계로 만들었다통혼도 그렇지만 사성(賜姓, 성씨를 하사함)도 왕건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군국제(郡國制)를 전국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인 유()씨를 지방 수장들에게 하사했다(심지어 그는 오랑캐인 흉노의 족장들에게도 유씨 성을 내렸다).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나 촉한을 세운 유비도 한나라 초기에 유씨를 남발한 덕분에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그런데 유방 역시 사성의 원조는 아니다. 진짜 원조는 주나라 시대의 종법제도(宗法制度). 주나라는 지배집단을 대종(본가)과 소종(분가)으로 나누어 끈끈한 혈연관계로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것을 종법봉건제라고 부른다. 이것에서도 역시 주나라가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이자 모든 동양식 질서의 근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든 조치들이 왕건 본인에게는 확실한 안전 장치로 작용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이 아닌 신분이라면, 즉 새 왕조의 건국자라면 누구나 건국 초기에는 왕권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새 왕조를 건국하기 전에는 전 왕조의 신하(혹은 전 왕조의 반란자)라는 신분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으로 고속 상승하는 셈이므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비록 왕건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았고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다지만, 지방 호족들이 왕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오로지 충정의 마음만 가득 담겨 있지는 않다. 그래도 왕건은 건국자였으므로 비교적 권위와 카리스마가 인정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건국의 당사자가 아닌 그의 아들들에게도 그런 권위가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은 알려진 자들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다. 이 왕자들이 고려 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송악에서 개성으로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개성의 지도다. 고려의 도읍지가 되기 전까지 이곳은 송악(松岳)으로 불리다가 919년에 왕건이 수도로 삼으면서 개주(開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비롯되어 고려시대에는 주로 개성이나 개경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도 대체로 개성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까지 일반에서는 송악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첫 번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호족

킹메이커의 내전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소유권과 수조권

먼 친구 VS 가까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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