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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다시 분열의 시대로(견훤)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다시 분열의 시대로(견훤)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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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분열의 시대로

 

 

효공왕(孝恭王)이 불명확한 태생과 불안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국의 상황이 어수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왕권을 노리던 경주 귀족들은 효공왕(孝恭王)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왕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라가 없다면 왕권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나라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시작은 진성여왕이 김위홍을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889년에 전국적으로 터져나온 반란이었다. 반란이야 9세기 초부터 늘상 있어오던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반란은 색다르다. 그 전까지의 무수한 반란은 거의 대부분 중앙 관직을 가진 경주 귀족들이 왕권을 노리고 일으킨 것이거나 최소한 지방에 파견된 귀족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중앙과 무관한 지방에서, 그것도 고위 관리가 아닌 자들이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중앙정부의 과세 정책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이니 무엇보다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이번 반란은 오래 갈 조짐이다.

 

반란의 불꽃은 먼저 상주에서 일어났으나 곧이어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반란이 원주에서 일어난다. 그 반란의 두목은 양길(梁吉)이라는 자인데, 그의 휘하에는 궁예(弓裔, ?~918)일설에 따르면 궁예는 헌안왕 또는 경문왕(景文王)의 서자라고 한다. 아마 그 자신이 부하들에게 그렇게 말한 듯한데, 만약 헌안왕의 아들이라면 헌안왕이 누이인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의도적으로 아들 궁예를 버렸다는 뜻이 된다. 스토리인즉슨 이렇다. 그의 아버지 헌안왕이든 경문왕이든 는 그가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점쟁이에게서 듣고 그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궁에서 일하던 여자가 그를 몰래 빼돌려 키웠다. 그 과정에서 궁예는 한 눈을 잃게 되었다.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권력을 잡은 뒤 궁예가 신라를 멸도(滅都, 멸해야 할 곳)라고 부르며 신라에서 오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린 것은 그런 사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탁월한 무장이 있었다. 891년 궁예는 양길의 명으로 강릉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2년 뒤에는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를 휩쓸어, 두목에게 반란군의 수령이 아니라 일국의 왕에 가까운 지위를 선물한다. 양길이 왕의 꿈을 부풀린 시기는 아주 짧았다. 궁예의 세력이 커짐을 경계한 그는 899년 휘하 군사를 이끌고 궁예를 처단하려 했다가 오히려 패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궁예는 양길의 부하들과 군대까지 받아들여 일약 한반도 중부의 패자로 발돋움했다. 이제 궁예는 사실상의 왕, 따라서 신라를 섬기던 지방 수령들도 줄줄이 그의 휘하로 들어온다(신라는 원래 경주 정권에 불과했음을 상기하라)그러나 궁예는 895년에 그에게 충성을 다짐한 왕융(王隆)이라는 자만은 부하로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왕융의 아들은 나중에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왕건(王建, 877~943)이기 때문이다.

 

 

경주 정권의 한계 궁예가 첫 도읍지로 정한 오늘날 철원의 그림이다. 이것으로 궁예는 반란군의 수괴에서 일약 일국의 왕으로 출세했는데, 이렇듯 중부 지방에서 쉽게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신라가 전국적인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경주 정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곧이어 견훤이 전주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한반도 중부를 잃으면서 이제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었다. 아직 만주에 발해가 존속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남북국시대가 아니라 남중북국시대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신라는 이미 남부에서마저도 주인이 아니었다. 양길이 봉기한 이듬해 이번에는 전주에서 견훤(甄萱, 867?~936)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장군이 된 그는 한반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주(지금의 광주)까지 손에 넣어 호남 전역을 지배한다(이 지역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장보고가 지배했던 곳이었으니 견훤은 아마 그 덕을 봤으리라). 옛 백제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백제의 화려한 옛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900년에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의자왕(義慈王)의 원한을 풀겠다면서 후백제의 왕을 자칭한다. 그 소식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그 이듬해에 송악(지금의 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수복하겠다고 선언하며 고려 왕을 자칭한다(중국 측 사서에는 옛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아마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를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들을 오리지널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 , , 西, , 등의 글자들을 붙인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마침 한반도에 후삼국시대가 전개될 무렵 중국에서도 옛 왕조의 부활이 줄을 잇게 되는데, 예컨대 화북에서 연달아 정권교체를 했던 5대 왕조, 즉 양() - () - () - () - ()는 역사에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명칭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가 부활했다. 비록 300년 전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으나 다시 찾아온 삼국시대, 이것을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졸지에 한반도의 단독정권에서 또 다시 삼국의 하나로 전락한 신라는 오리지널 삼국시대 때도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후삼국시대에서도 약소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효공왕(孝恭王)은 비록 예상치 못한 왕위를 얻었고 예상치 못하게 오래 재위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부활한 백제와 고구려에게 몹시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치세에는 동아시아의 커다란 격변이 일어난다. 907년 중국의 당나라가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일이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데, 이제 그 기둥이 내려앉았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왕실의 전통

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삼국의 쟁패

러키보이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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