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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순수 무장의 집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순수 무장의 집권

건방진방랑자 2021. 6. 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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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무장의 집권

 

천황의 지위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황후로 집어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척 정치와 같은 셈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실권을 가진 중국의 천자에 비해 일본의 천황은 한층 초라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분열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내 후지와라도 네 가계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일삼았다(그 가운데 북가北家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침내 858년에 섭정이 된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는 천황을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섭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섭정 정치가 지속되자 아예 제도로 자리 잡았다. 원래 섭정은 천황이 어릴 때에만 둘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요시후사의 대를 이은 후지와라 모토쓰네(藤原基經, 836~891)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냈다. 천황이 성장한 다음에도 섭정이 예전과 같은 권력을 지닐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섭정은 명칭이 달라져야 할 게다. 이리하여 간바쿠(關白)라는 직위가 탄생했다. 이제 후지와라 가문의 맏아들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여보낸 다음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어른이 되면 간바쿠로 집권을 연장하는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 말하자면 상징적 권력인 천황과 실질적 권력인 섭정-간바쿠가 모두 세습되는 식인데, 이것을 셋칸(攝關) 체제라고 부른다.

 

이렇게 중앙 권력을 완전히 틀어쥔 후지와라 가문은 폭정으로 내달렸다. 적수가 될 만한 귀족 가문이 상급 관료들을 모두 제기하고, 황족과 상층 귀족에게 지방에서 생산된 수입을 분배하는 지쿄코쿠(知行國)()’는 원래 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일을 맡는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고려와 조선 시대에 전대 원이 유고되었을 경우 후임 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기 전까지 정식 왕이 이닌 신분에서 나랏일을 임시로 맡아서 한다는 뜻으로 권지국지(權知國事)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도 같은 뜻이다. 오늘날 도지사(道知事)라는 직책에 있는 ()’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도를 시행한 것까지는 여느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전제정치다. 그러나 후지와라 가문은 더 나아가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확립한다. 그들이 사병 조직으로 거느린 무사단이 바로 사무라이(). 사무라이란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니 원래는 그리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었지만, 이후 무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사 계급, 나아가 일본 전제의 대명사가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재와 전횡을 일삼던 후지와라 가문에게도 이내 만만찮은 적수가 등장한다. 섭정이든 간바쿠든 천황을 등에 업어야만 가능하다(그래서 친황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 왕실처럼 실권은 없어도 상징적 의미가 컸다). 물론 천황의 외척이라는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후사가 계속 나와야만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문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윽고 황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이 생겼다. 1068년 후지와라와 외척 관계가 없는 고산조(後三條, 1034~1073) 천황이 즉위했다. 즉위하기 전까지 후지와라의 심한 견제를 받은 그는 천황이 상징 권력에 머물지 않고 현실 권력을 가지려면 후지와라 가문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우선 후지와라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장원 정리 사업에 착수하고 별도의 행정 기구로서 원정을 설치했다.

 

물론 그런 잽 정도의 주먹을 맞고 후지와라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산조의 뒤를 이은 다음 천황 시라카와(白河, 1053~1129)는 후지와라에게 카운터블로를 안긴다. 그는 셋칸 체제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절묘한 방책을 구사했다. 천황이 성장한 뒤에도 섭정이 간바쿠로 권력을 유지한다면 천황도 그렇게 하자! 시라카와는 재위 13년 만에 천황위를 양위하고 상황(上皇)이 되었다. 아무리 셋칸이라 해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전임 천황만은 못하다. 상황이 원청에서 원정(院政)을 실시하자 마침내 후지와라의 독재는 무너지고 실권이 다시 천황 세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상황의 선례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천황이 병에 걸리거나 너무 연로할 경우에는 제위를 양위하고 태상(太上) 천황, 즉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명칭은 달라도 이런 사례는 중국과 한반도, 유럽의 역사에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직접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일본의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정치의 내용이다. 3대째 상황의 원정이 지속되었어도 전혀 개혁 정치는 없었고 셋칸 시대와 달라진 것도 없었다. 정치가 현저하게 퇴보와 후진성을 보이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후지와라 독재가 끝난 뒤 형세는 황실과 후지와라 셋칸 가문, 귀족, 그리고 여기에 유력 사찰들이 조직한 무장 승병 집단 세력까지 더해져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일본 전역에서 이들 세력의 사병 조직들 간에 무장 충돌이 빈발했다.

 

난세에는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혼란의 와중에 후지와라의 무사단(사무라이) 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 천황 측의 사병 조직인 다이라 가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무력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으나 세상이 혼탁해지자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점차 그들은 실력에 걸맞은 지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156년에 그들의 실력을 가늠할 기회가 생겨났다. 상황 세력과 천황 세력이 황위 계승권을 놓고 격돌한 호겐(保元)의 난에서 미나모토와 다이라는 최초로 진검 승부를 펼친다. 승리는 천황 세력이었으나 진정한 승자는 다이라 가문의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 1118~1181)였다. 이 사건은 사실상 상황과 천황이 싸운 게 아니라 전통의 황족 귀족 세력과 신흥 강자인 무사 세력이 벌인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무사 계급이 황족 귀족의 용병이었으나 불과 3년이 지나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1159년 설욕을 꾀한 미나모토 가문은 헤이지(平治)의 난을 일으켰으나 다시 한 번 기요모리에게 패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호겐의 난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들러리였던 무사 세력은 자기들끼리 싸운 이 헤이지의 난을 계기로 일약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승자인 기요모리는 유명무실해진 귀족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전까지의 일본 역사에서도 순수한 관료 정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순수 무장이 집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은 일찍이 어느 민족에게도 없었던 격심한 반란과 내전의 역사다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무장 세력이 집권할 무렵 한반도에도 무신 정권이 성립했다. 1170년 고려의 무신인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 정권을 열었고, 이후 이의민과 최씨 정권을 거치면서 100여 년 동안이나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13세기에 몽골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무신 정권은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반도와 일본에서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무사들의 대결 귀족들의 휘하에서 대리전을 수행하던 무사들이 최초로 자기들끼리 패권을 겨룬 전쟁이 헤이지의 난이다. 이 전쟁에서는 다이라 가문이 이겨 권력을 손에 넣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미나모토 가문의 열세 살 소년 요리토모는 훗날 다이라에게 복수하는 것은 물론 최초의 쇼군이 되어 최초의 바쿠후 권력을 수립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모방의 한계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순수 무장의 집권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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