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들의 내전
왕건이 각지에 뿌려놓은 혈연의 씨앗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불화의 씨앗으로 변한다.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아들을 얻은 것까지야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보면 복 받았다 하겠지만, 그 때문에 상속자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이인 무(武)가 혜종(惠宗, 재위 943~945)으로 즉위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비록 맏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더구나 그는 그 왕자들의 실제적 서열을 가르는 기준에서 결격 사유가 있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이므로 진짜 킹메이커는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혜종의 어머니는 나주 오씨, 그러니까 910년에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나주를 점령했을 때 인연을 맺은 집안인데, 당시에는 지방의 큰 토호였지만 전국이 통일된 지금은 미약한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왕건은 사실상 자신의 첫 아내이자(실제 첫 아내인 개성의 유씨는 왕건에게서 버림을 받고 절에 들어갔다) 첫 번째 세력 기반이었던 만큼 생전에 오씨와 맏이인 무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베풀었다. 아마 자신이 죽고 나서 복잡해질 왕위계승 문제를 미리 짐작한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무에게 자신의 심복이었던 개국공신 박술희(朴述熙, ?~945)를 후견인으로 붙여주었다. 사실 무가 태자로 책봉된 데는 박술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으므로 그때부터 박술희는 무를 간판으로 삼아 왕위계승전에 출전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혜종이 즉위한 것으로 박술희는 야망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랐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도전보다 방어가 어려운 게 타이틀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자는 한 체급쯤 위인 강펀치의 소유자, 바로 경기도 광주(廣州)의 호족인 왕규(王規, ?~945)다. 왕건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인 그는 외손주인 광주 원군을 왕으로 밀기 위해 혜종을 두 차례나 암살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혜종은 자신의 침실에까지 자객을 보낸 자가 바로 왕규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했으니, 왕규의 위세가 어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사실 혜종은 왕규의 야망을 달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그의 아내 중에 왕규의 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도 역시 아버지 왕건처럼 정략결혼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듯하다(혜종이 왕규를 응징하지 못한 데는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을까?). 그 덕분에 혜종은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면서 동서간이라는 묘한 사이가 되었는데, 중국의 당나라 황실(측천무후와 양귀비의 경우)이나 신라의 왕실 도 그랬듯이 고려 왕실에서도 근친혼은 일반적이었으므로 욕 먹을 일은 못 된다. 오히려 왕건은 미약한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바 있었다(근친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유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시대부터다)】. 결국 혜종은 재위 2년 만인 945년에 병으로 죽었는데, 당시 서른셋의 한창 나이였음을 감안하면 과연 진짜 병사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혜종에게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왕위계승은커녕 제 목숨이나 걱정해야 할 팔자다. 건국자인 왕건의 체면을 봐서 1라운드를 탐색전으로 넘겼던 호족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나선다.
만약 왕규가 혜종을 암살했다면 그건 죽 쒀서 개 준 격일 것이다. 광주원군은 단독 대권후보가 아니었고 또 다른 막강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호족인 유씨를 외가로 둔 왕자 요(堯)는 외가만이 아니라 장인도 든든한 ‘빽’이다(그의 장인은 바로 견훤의 사위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박영규였는데, 왕건도 박영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적이 있으니 왕요도 배다른 형인 혜종처럼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자 동서간이 된다). 게다가 그는 혜종에 이어 왕건의 차남이므로 형식상의 서열로 봐도 광주원군보다 앞선다. 사실 혜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왕규가 진정한 적수로 여겼던 것은 혜종이나 박술희가 아니라 바로 충주 세력이었다. 과연 왕규가 걱정한 것처럼 혜종이 남긴 왕위는 광주원군이 아니라 요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정종(定宗, 재위 946~949)으로 즉위한다. 아마 이 과정에는 혜종의 사후에도 킹메이커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박술희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왕규가 맨먼저 살해한 인물도 바로 박술희였다. 하지만 충주 세력은 작은 ‘갱단’이 아니라 이미 서경(평양) 세력과도 연계되어 있는 ‘빅패밀리’였다. 왕규의 반란이 일어나자 왕건의 종제이자 서경의 실력자였던 왕식렴(王式廉, ?~949)은 즉각 군대를 몰고 개경(개성)으로 내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왕규 일당 300여 명을 대거 처형한다.
왕식렴의 충성에 감격한 탓일까? 아니면 중부 지방의 호족들이 판치는 개경에 신물이 난 탓일까? 아무튼 정종은 내친 김에 왕식렴의 의견을 좇아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개경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서경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즉위한 왕답게 그는 개경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 되어 결국 재위 3년 만에 친아우인 소(昭)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죽는다(정종에게도 경춘원군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나 혜종의 아들들처럼 그도 역시 왕위계승을 주장할 입장은 못되었다). 소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고려의 왕권은 안정을 찾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4대 왕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다.
앞서 왕건이 뿌린 모순의 씨앗이 초기의 혼란을 빚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이처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된 데는 왕건의 책임이 크다. 943년 그가 죽으면서 유언 삼아 자신의 후손들, 즉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훈요 10조」에는 왕위계승에 관해 충분히 논란을 부를 만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도리지만, 맏아들이 어리석을 경우에는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고,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가 왕이 되게 한다.’ 이것이 훈요 10조의 제 3항인데, 개국 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권력 승계의 원칙이 이렇듯 무원칙할 수 있을까? 도대체 스스로 어리석다거나 불초하다고 인정할 만큼 어리석고 불초한 왕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보면 왕위계승 분쟁은 이미 왕건 자신이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왕건이 남긴 모순된 유훈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훈요 10조의 첫 항에서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한다’면서 불교 장려를 촉구하는가 하면, 마지막 항에서는 “옛 경전과 역사서를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으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권장한다. 이 엇갈린 가르침은 이후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제와 관료제가 뒤섞인 잡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데, 이것이 광종(光宗) 때 나타난 둘째 모순이다.
▲ 모순에 찬 유훈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는 고려의 건국 이념을 담고 있으나, 실상은 고려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면이 많았다. 고려 왕조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오히려 혼란을 자초한 인상이 짙다. 위의 그림에는 「훈요 10조」를 받아 적게 한 박술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희(熙)’ 자 대신 ‘희(希)’ 자를 쓴 게 이채롭다. 아마 발음이 같아서 그랬겠지만 이처럼 공식 문서에 이름을 달리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이두를 많이 썼음을 말해준다. 아래 그림에는 「훈요 10조」의 1항부터 5항까지의 내용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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