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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노비안검법, 과거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노비안검법, 과거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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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즉위한 처지였으니 광종(光宗)은 당연히 은인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배다른 형 혜종은 불과 2, 친형인 정종은 겨우 3년간 재위했고, 둘 다 한창 젊은 나이에 죽었다. 왕권을 능가하는 호족들의 권력, 광종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왕위는커녕 목숨조차 위협받을지 모른다. 그가 즉위 후 7년간이나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광종(光宗)은 결코 왕위 유지에만 급급한 쭉정이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이 즉위하는 데도 호족의 도움을 입기는 했지만 호족들의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고려는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형들의 재위 기간을 훌쩍 뛰어넘고 어느 정도 왕권이 공고해지자 이윽고 광종은 서서히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착수한다. 호족들을 제어하려면 먼저 그들의 물리력을 빼앗아야 한다. 그들이 왕위계승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종(光宗)은 호족들의 사병 조직이 기본적으로 노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노비란 주인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까 농사를 짓게 하든 군대로 편성하는 남이 뭐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원래 찾으면 보이는 게 빈틈이다. 호족들의 노비는 거의 대부분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멋대로 토지를 병합하면서 토지에 딸린 일반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은 결과다. 당시는 비정상적인 혼란기였으니까 이제 와서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고려가 개국한 지 벌써 40년이 지났고 삼국통일을 이룬 지도 20년이나 지났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게 정상화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노비였던 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강제로 노비가 된 백성들은 다시 양민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논리에서 950년 광종(光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다. 일종의 때이른 노예해방인 셈이지만 실제 목적은 근대적 노예해방과 달리 인도주의적인 데 있지 않고 호족들의 무장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다. 호족들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감히 광종의 드라이브에 노골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한다. 7년간의 침묵이 효력을 본 것이다. 그동안 왕권이 공고화되었으니까. 게다가 광종은 짭짤한 부수입도 얻었다. 노비로 신분상승한 양민은 이제 호족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 기반도 약해졌고 중앙재정은 그만큼 튼실해졌다.

 

 

 

 

그러나 광종(光宗)의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족들의 물리력은 제압했지만 지역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행정력은 여전하다. 사실 치열한 왕위계승전이 끝나고 나라가 정상화된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게도 군사력은 부차적인 권력 기반일 뿐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958년에 2차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게 바로 과거제(科擧制)오늘날 우리는 시험을 통해 인력(공무원, 학생 등)을 선발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서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걸 철칙처럼 여기지만, 막상 과거가 처음 실시될 때는 얼마나 낯선 것이었을까? 사실 이런 방식은 국가권력이 강력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시행할 수도 없는 제도다. 관리(官吏)라는 말 자체가 ()에서 일하는 벼슬아치[]’라는 뜻이니까 이 없다면 관리도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통일 권력이 늦게 발달한 서양의 역사에서는 관이 없었기에 동양식 관리와 같은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과거 같은 제도가 필요도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서양의 경우에는 국민국가가 성립하는 17세기부터 관리와 관료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주로 귀족들이 관직을 맡았으며, 18세기 시민 사회 시대에 들어서는 시민들의 선출에 의해 관리가 임명되는 방식이 자리잡는다. 그에 비해 동양 사회에서는 근대에 들어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과거가 가장 주요한 관리 임명제도로 기능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의 입시지옥과 각종 국가고시의 폐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광종은 중국의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그는 아마 처음부터 호족들이 분립하는 무질서를 타개할 장기적인 구상으로 중국적 질서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쌍기는 후주에서도 황제 세종의 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병을 얻어 치료하던 중 고려인으로 귀화했다). 중국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축이 아니던가? 무릇 한반도 왕조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에 편입되는 게 안정이며 번영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요 혼란이었다. 광종(光宗)이 과거제를 도입한 목적은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중국적 질서에 편입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즉위 직후 광종은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는 등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시 중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스처를 보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광덕이라는 연호는 얼마 사용되지 못했고 곧 그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960년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웠을 때도 광종(光宗)은 또 잠시 준풍(峻豊)이라는 별도의 연호를 쓴 적이 있으나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그 무렵 광종은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르고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으나 그건 신생제국인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준풍을 끝으로 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19세기 말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기까지 두 번 다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일이 없다.

 

어쨌든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생겨 났으니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목이다. 과거(科擧)라는 말 자체가 과목으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뜻이니까. 그럼 시험 과목은 무엇으로 할까? 전통적인 불교 사상? 아니면 왕건이 탐닉했던 도참설과 풍수지리설? 하지만 둘 다 관리를 뽑는다는 취지에는 걸맞지 않은 학문이다. 사실 광종(光宗)은 애초부터 과목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신흥 학문인 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옛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탄생할 때부터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수직적 질서(국왕을 정점으로 삼고 사대부들이 그를 보좌하는)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던가? 신라 말기 독서삼품과나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유학이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신라는 유학을 도입하기만 했을 뿐 현실에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대에 들어 왕권이 약해졌고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이다.

 

 

 

 

더구나 유학은 불교나 도참설에 비해 훨씬 체계적이고 문헌에 의존하는 학문이므로 과거의 과목으로 채택하기에도 최고다. 모름지기 시험이라면 문제를 출제할 수 있어야 하고 교과서도 필요한 법인데, 유학은 마치 과거를 위해 태어난 학문인 듯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이렇게 해서 시행된 과거의 과목은 명경과(明經科), 제술과(製述科), 잡과(雜科)의 세 가지였다. 우선 명경과란 이른바 5(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경전들을 달달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것이니, 오늘날 대학입시로 말하자면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한다. 또 제술과는 시(), (, 산문), (, 제문), (, 시사) 등 여러 장르의 글을 짓는 것이니, 이를테면 논술고사다. 그리고 잡과는 말 그대로 기타 학문으로서 수학, 지리학, 의학, 법학, 점술학 등등인데, 유학 중심의 과거에서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으로서 필요한 과목들이다(고려의 과거제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이는 송 태조 조광윤의 문치주의를 모방한 탓이다. 그러나 이후 고려는 무관을 차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으로 호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과거제로 그들의 행정력을 약화시키면서 광종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세를 몰아 그는 960년에 송나라의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를 본떠 관리들의 등급을 9품으로 구분하고 네 가지 색깔의 관복을 정했으며, 한반도 동북부와 서북부를 개척하는 등 국토 확장에도 힘을 쓸 수 있었다. 관리의 위계를 결정하고 영토를 확정했다면 새 나라의 건국이나 다름없다. 왕건이 고려라는 나라의 명패를 만들었다면 광종(光宗)은 사실상의 2대왕으로서 고려를 재건국한 셈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왕건이 훈요 10에 남긴 또 하나의 모순, 즉 귀족과 관료의 모순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두 번째 건국 왕건은 고려의 명패만 올렸을 뿐이고 실제로 고려가 나라꼴을 갖추게 된 것은 광종의 공로다. 광종의 양대 업적이라면 단연 과거제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들 수 있다. 위는 고려사에 나온 쌍기(雙冀)에 관한 기록이고, 아래는 고려의 노비문서다. 진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이 두 가지 성과도 역사적 업적을 쌓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첫 번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호족

킹메이커의 내전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소유권과 수조권

먼 친구 VS 가까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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