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과거의 핵심이 유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광종(光宗)이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데는 단순히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흥 왕조인 고려를 유학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컨대 과거제의 ‘형식’은 (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 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 (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광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군주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쉽게도 그의 성적표는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문제는 고려 사회 자체가 과거제와 어울리지 않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과거제의 기본 기능은 중앙정부에서 단일한 절차를 통해 행정 관료들을 충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여건은 그 취지에 부합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행정이 그렇다. 비록 광종(光宗)의 강력한 압박 전술로 호족들은 개국 초기처럼 왕권을 넘볼 만큼 위세를 떨치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자기 지역에서는 거의 독립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아무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한다 해도 그 관리가 지역의 실세인 호족들을 무시하고서 중앙에서 위임받은 행정을 담당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중앙정부는 모든 현의 지방관, 최소한 지방 수령 하나만이라도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로 충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건 마음일 뿐이다. 호족의 힘이 약한 지역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지만 대호족이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지역에서는 좀처럼 중앙의 입김이 먹혀들지 않는다. 호족들은 예전처럼 왕권에 간섭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대신 지역의 지배자라는 신분만큼은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한다.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을 이룬다는 꿈은 이미 물건너 갔으니 결국 중앙정부는 호족들과 다시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속현(屬縣,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행정 구역)이다. 대호족의 근거지는 호족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서 주현(主縣)으로 삼고, 그 휘하에 있는 중소 호족들의 세력권은 속현으로 편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중앙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은 대호족의 ‘사랑방 손님’처럼 형식적인 수령의 지위만 유지하고, 주현 부근에 있는 속현들의 지방행정은 주현의 실제 주인인 호족이 알아서 관장하는 식이다. 모두 335개에 이르는 고려의 현 가운데 속현의 수는 무려 90퍼센트가 넘었으니 이것만으로 보면 고려 왕실은 사실상 한반도의 단독정권이라는 수준도 못 되는 셈이다(이후 속현은 조금씩 줄어갔으나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중앙집권화가 확실히 이루어지는 조선시대의 일이다).
과거제(科擧制)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하기야, 애초에 무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중앙집권을 과거제라는 제도로써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제는 처음부터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실 그런 한계는 과거제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고려의 과거제는 제도 자체로도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릇 국가고시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라면 모든 관리, 적어도 일정한 직위 이상의 관리는 반드시 과거를 통해서만 임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만이 고려 사회의 유일한 등용문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적어도 가문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음서(蔭敍)라는 제도다. 말 그대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고시에 무시험으로 패스하는 경우다. 음서는 처음에 개국공신들의 자제만으로 한정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일회성에 그쳐야 했으나, 원래 특권이라는 게 근절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음서는 점차 그 폭이 확대되면서 과거와 더불어 정규 관리 임명제도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것 역시 지방 호족들의 현실적 영향력을 배려한 결과임은 물론이다【사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음서로 관직에 오른 관리의 수는 과거를 거친 관리보다 훨씬 적었으므로 음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는 650명의 관리들 중 과거에 합격한 자는 340명, 음서 출신은 40명이고, 기타가 270명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상의 음덕이라는, 편법으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한 등용문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과거제를 통해 관료제 사회를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합격자를 선발하는 데도 지공거(知貢擧, 고시관)의 입김이 컸을 뿐 아니라 과거에 합격해도 현직에 임용되거나 승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문벌이 중요했다. 앞에 말한 ‘기타 270명’ 역시 음서는 아니었어도 그와 비슷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임용된 관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과거제(科擧制)는 분명히 고려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가 있었으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 즉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고려 사회는 아직 유교보다는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이 지배하고 있으며, 정치 체제의 측면에서도 과거를 바탕으로 하는 관료제 사회라기보다는 전통의 호족들이 자기 지역을 관리하는 귀족제 사회다. 이렇듯 과거제(科擧制)가 시행되면서도 귀족 지배 체제에 머물러 있는 사회를 중국 역사에서는 바로 당나라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동시대에 중국을 지배했던 송나라보다는 전 시대의 당나라와 같은 위상이다. 일찍이 당나라는 과거제를 도입했지만 실제 행정권은 과거를 통해 임용된 관료들이 아니라 전통의 문벌귀족(관롱집단)들이 지니고 있었으며, 안사의 난 이후에는 변방의 절도사들이 사실상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지역에서 사병을 거느리며 자치권을 행사했으니 여러모로 고려 왕조와 닮은꼴이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과 한반도의 문명적 차이는 200~300년쯤 되었다고 할까【그럼 중국의 송나라에 해당하는 한반도 왕조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후대의 조선이다. 당나라에서 시행된 과거제(科擧制)가 송나라 때 꽃피웠다면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사회의 골간이 되었다. 송 나라가 완벽한 유교 제국이라면 조선은 완벽한 유교 왕국이다. 즉 송나라와 조선은 둘 다 유학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 체제의 완성태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지만 송나라와 조선에서 당쟁이 극에 달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학이 체제 내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면 그 다음에는 유학 내부의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일 테니까】?
당나라가 그랬듯이 고려도 이념적으로는 유학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자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귀족(호족)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으로 보면 왕건의 모순된 건국 이념(훈요 10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광종(光宗) 때까지는 아직 지배 체제의 문제일 뿐이니까 사회 전반에 대한 파급력은 별로 없다. 이를테면 지방행정을 지방관이 담당하는 호족이 담당하는 일반 백성들의 삶은 별반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순이 다음 왕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 대에 제정된 토지제도의 문제점으로 이어지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 입시지옥의 기원 시험을 통해 관리나 학생을 뽑는다는 발상이 지금 우리에게 낯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제(科擧制)의 역사를 오래 지녀왔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제도다. 인재를 보는 안목에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문제를 내고 그걸 풀게 했을까? 그림은 중국 송나라 때 과거 응시장의 풍경인데, 오늘날의 대학입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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