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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1장 모순된 출발,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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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또 하나의 모순이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그런 대로 별탈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첫째 모순 때문에 완벽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둘째 모순으로 인해 정상적인 관료제 사회조차 이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셋째 모순은 고려 사회 내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요 104항과 5항에서 왕건은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하고 배척하라고 가르치면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다. 거란이라면 당시 랴오둥을 장악하고 있던 북방 민족이므로 고려와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왕건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들을 적대시하고 그 적대감을 시위하듯이 서경을 전진기지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물론 왕건은 늘 고려가 옛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접경하고 있는 이웃을 굳이 배척하라고 가르친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국의 이민족 왕조인 북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왕조가 아니었던가?

 

만약 왕건이 중국에서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되는 것을 보고 죽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훈요 10조가 아니라 훈요 11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송나라를 받들고 나라의 모범으로 삼으라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위 중에 이미 그는 중국의 5대 왕조에게 10여 차례나 사신을 보내면서 적극적인 사대외교를 펼친 바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북방의 거란을 배척하고자 한 이유는 명백하다. 친구의 적은 나의 적, 중국의 한족 왕조를 받들고자 노력한 그로서는 한족 왕조의 적인 북방의 이민족 국가를 적대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그가 겉으로 내세운 슬로건과는 달리 고구려보다는 오히려 신라를 계승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긴, 신라의 경주 정권을 인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힌 그로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주의 옛 신라 왕족과 6두품 세력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왕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궁예 시대부터 이어진 후고구려 세력을 제치고 고려의 최대 파벌로 떠올랐다(중기 이후 이른바 권문세족으로 발돋움하는 경주 김씨, 경주 최씨, 안동 권씨 등은 모두 신라계다). 경주 귀족이라면 모름지기 중국의 한족 왕조에 사대하는 게 기본 의무다이런 점에서 보면 사실 고려는 굳이 생겨날 필요가 없는 왕조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왕실의 혈통만이 달라진 것 이외에는 제도로 보나, 지배 세력으로 보나, 지배 이념으로 보나 신라와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신라 역시 말기에 비록 왕실은 심하게 흔들렸지만 어차피 관료제 사회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유학 이념도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고려와 신라를 같은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 진화의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인 체제는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나중에 고려를 대체하는 조선도 고려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는 체제라고 보면 한반도 왕조들은 늘 내적인 필연성이 없이 교체된 셈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왕조 교체는 내적인 요인보다는 외적인 요인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할 때 중국이 당-송 교체기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할 때 중국이 원-명 교체기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중대한 판단미스였고, 더구나 고려가 신흥국임을 고려한다면 심각한 사태를 부를 수도 있었다. 927년에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북방의 패자로 발돋움한 거란은 대륙의 지배자인 송나라마저 위협하는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거란은 처음부터 랴오둥 진출을 포기했던 발해보다는 분명히 한 급 위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랴오둥을 터전으로 삼지 않으면 왕조를 존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나아가 랴오둥을 발판으로 대륙의 중심인 중원을 정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왕건이 궁예에게서 정권을 인수받기 2년 전인 916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요()로 바꾸고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를 칭한 것을 보면 그 야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중국 한족 왕조의 낙점만을 애타게 바라는 왕건의 눈에는 그런 거란의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 933년 왕건은 5대 왕조의 하나인 후당의 책봉을 받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예비고사를 통과했다고 기뻐했지만, 그 후당은 불과 3년 뒤에 요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아마도 당시에 극동일보가 있었다면 이 소식이 단연 1면 톱기사감, 그러나 왕건은 같은 해에 후백제를 접수하고 후삼국통일을 이룬 것에만 마냥 흡족해 할 따름이었다. 후당을 멸망시킨 부수입으로 요나라는 베이징 인근의 연운 16를 얻었다(후당을 대체한 후진이 요나라의 힘을 빌린 대가로 제공한 땅이다). 이로써 거란은 자기네 역사상 처음으로 이 지역에 사는 한족 백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다음 목표는 물론 중원이다.

 

그 뒤 요나라는 내부 권력다툼이 발생하면서 잠시 성장세가 주춤하는데, 사실 960년에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고 대륙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 크다. 그러나 비록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지만 요나라에게도 그 기간은 아주 요긴했다. 권력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앞서 있는 한족 왕조에게서 선진 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71년 조광윤이 대장경을 만들게 한 것을 본받아 독자적인 대장경을 조판한 게 그런 예다(그에 대한 경쟁으로 고려도 나중에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온하던 송-요 관계에 먹구름이 끼이기 시작한 계기는 조광윤의 동생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송 태종이 연운 16주를 아까워한 데서 비롯된다.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실지 수복을 위해 요나라를 침략했으나 그건 동전을 주우려다 지갑마저 떨어뜨린 꼴이 되고 만다(당시 태종은 고려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아직 대중국 사대관계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거절당했다). 오히려 그 전쟁에서 승리한 요나라는 중원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고려가 고래들의 싸움에서 새우가 될 가능성은 점점 짙어진다. 거란을 멀리 하라고 가르친 훈요 10조는 고려 왕조가 실은 새우의 처지임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찍이 진시황제원교근공(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이라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해서 대륙 통일을 이룬 바 있지만, 그건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나 쓰는 전략이다. 바깥으로 내세울 것 없고 안으로 보잘것없는 고려에게는 오히려 근교원공이 훨씬 타당한 대외정책이다. 가까운 요나라를 적대시하고 먼 송나라에게 사대하려 한 고려의 모순된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피바람을 부른다.

 

 

한족과 금수차이 왕건이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은 이유는 자신의 치세에 이미 중국의 한족 왕조가 네 차례나 흥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광윤(위 그림)이 건국한 송이 통일제국으로 자리잡는 것을 본 광종(光宗)은 송나라와의 수교가 아버지의 뜻에 부합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과 사대관계를 맺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금수인 거란의 분노를 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첫 번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호족

킹메이커의 내전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소유권과 수조권

먼 친구 VS 가까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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