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과 용병
마치 종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몽골 황제 몽케 칸과 고려 국왕 고종은 1259년에 함께 죽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황제와 왕이라는 신분 차이보다도 컸다. 오히려 고종과 비슷한 삶을 산 인물은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종이다. 두 임금이 같은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같은 운명을 암시한 걸까? 고려의 고종은 내내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고 30년을 강화도에서 보내야 했으며, 조선의 고종은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아버지와 마누라에 휘둘려 바지저고리로 지내다가 급기야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까지 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고종 모두 예순일곱 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은 채 죽었다.
그래도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달리 몽골 식민지 시대에는 사직이나마 보존한 것을 감안하면 고려의 고종이 덜 불행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속국이라는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고종이 죽자 몽골에 가 있던 태자가 돌아와 원종(元宗, 재위 1259~74)으로 즉위했다. 일단 왕통은 그럭저럭 이었지만 그에게 실권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그에게 주어진 특명은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 본연의 임무가 아닌 개경 환도일 따름이다. 그러나 왕 자신은 아무 힘도 없지만 그의 등 뒤엔 몽골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 최씨 정권을 타도하고 난 뒤에도 무신 집권을 이어가려는 김준 일당이 소홀히 여긴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유일한 권력의 원천은 몽골이라는 것을 확신한 원종은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몽골에 협력한다. 우선 개경 환도를 위해 그는 1268년 개경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한다. 그러자 김준은 당연히 반대했고, 김준과 왕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해서 또 다른 무신 임연(林衍, ?~1270)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다. 물론 그도 환도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래서 그는 원종을 폐위하고 원종의 동생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 된 지금까지도 집권 무신이 국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몽골로 도망친 원종은 4개월 만에 당당히 돌아와 복위했고, 못난 임연은 몽골 본국의 문책에 고민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 ?~1270)는 멋모르고,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았다가 몇 개월도 못 가서 원종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니, 이것이 무신정권의 최종적인 몰락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어도 아직 뒤풀이가 남아 있다. 1270년 원종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했는데, 40년 만의 환도를 기념한 것은 경축 행사가 아니라 반란이다. 그 주역은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고 실업자 처지가 되어버린 군대, 즉 별초군(別抄軍)이다. 그동안 손 안에 가지고 놀던 정부를 놓쳤으니 이제 군대는 완전한 깡패 조직에 불과하다. 새로 뽑힌 보스 배중손(裵仲孫, ?~1271)은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강화도에 남아 개경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삼별초는 몽골 침략기에 대몽 항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기에 역사 교과서에는 그들이 마치 우국지사인 것처럼 평가되어 있지만, 사실 그들은 받들어 섬기던 집권 무신이 제거된 데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출발부터 삼별초는 최우(崔瑀)가 친위대로 편성했던 만큼 무신정권의 사병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들의 대몽 항쟁도 기본적으로 강화도 정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므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의 봉기에 일부 민중이 지지를 보낸 것은 몽골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 고려 정부를 자처한 삼별초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문서다. 성격은 반란군이지만 삼별초는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어 대몽 항쟁의 주체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고려 정부로 자칭했다.
애초에 배중손이 믿었던 것은 미처 강화도에서 나오지 못한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는 등 부산 떠는 틈을 타 인질들은 재빨리 육지로 도망쳐 나온다. 그렇다면 삼별초(三別抄)도 더 이상 강화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남쪽으로 가 진도에 근거지를 트는데, 그들이 기세를 떨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박을 이용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제주도에서 거제도까지 남해상의 섬들을 점령하니 옛 장보고(張保皐)가 부럽지 않다. 특히 항구들을 장악하고 중앙으로 가는 조운을 방해한 것은 개경 정부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준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반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의 건국이 될 판이니, 개경 정부는 장보고 시대 경주 정부의 심정이 어땠을지 공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무기력한 면에서는 개경 정부도 9세기의 경주 정부에 못지 않다. 염장(閻長)의 역할을 해준 것은 역시 몽골군이었다. 하긴, 고려의 군대는 반란군이 되었으니 개경 정부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었겠지만, 몰락한 무신들 대신 다시 문신으로 군 사령관이 된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1271년 총공세를 펼친 끝에 마침내 진도를 함락시키고 배중손을 잡아죽였다. 이후 삼별초(三別抄)는 김통정(金通精, ?~1273)을 우두머리로 삼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저항을 계속하다가 2년 뒤에 최종적으로 진압된다.
명백한 반란임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일단 몽골에 대한 반감 때문이지만 그밖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世祖, 재위 1260~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1260년 몽골의 제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정복왕조에서 벗어나 중국식 제국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민족 왕조로서 장기적인 생존과 발달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황제의 시호를 중국식으로 고치고(그래서 그는 몽골제국으로 보면 5대 황제이지만 원나라로 따지면 초대 황제가 된다) 이름만 남아 있던 남송을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쿠빌라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전까지의 어느 중화 제국도 이루지 못한 동아시아 전역의 통일을 시도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본마저 정복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천 앞바다의 물살조차 부담스럽게 여겼던 몽골군이 거친 현해탄을 건너기란 불가능하다. 뱃멀미는 물론이고 당장 병력 수송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의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선박을 건조하도록 명한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진압된 뒤 1274년 드디어 몽골군은 남송군과 고려군을 거느리고 현해탄을 건너는데(당시 고려군 사령관은 김방경이었다), 무려 900척의 대선단이었으니 선박을 만들고 군량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고려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집권자인 호조 도키무네는 겨우 스물세 살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무신 집권자들처럼 교활하고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천황을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않고 결연하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록 때맞춰 불어온 태풍으로 원정군의 선박들이 깨져나가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지만 가마쿠라에서 멀리 규슈까지 군대를 파견한 기개는 대단했다. 정복의 한을 풀지 못한 쿠빌라이는 1280년 개경에 정동행성(征東行省, 말 그대로 동쪽의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관청이다)을 설치하고, 이듬해 무려 14만 명의 병력과 4천 척의 함대로 다시 규슈에 상륙했는데, 불행히도 또 태풍이 불어닥쳐 200척의 선박만 남기고 모조리 침몰해 버렸고 인명 피해도 10만 명에 달했다【두 차례의 태풍으로 국난을 넘긴 덕분에 당시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 불렀다. 1274년의 위기를 넘기자 호조 도키무네(Hojo Tokimune, 北條時宗, 1251~1284)는 “신이 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면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을 과감히 죽여 버리기도 했다. 물론 신이 일본을 수호할 리는 만무지만, 어쨌든 여기서 비롯되어 나중에 일본을 통일하게 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라 주장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서양 선교사들이 전파하려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기 위해 ‘신국론’을 들먹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차 대전시 일본 공군의 자살 특공대를 가미카제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는 이렇게 깊고 오래된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함께 세계제국 몽골이 정복하려 했다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으로 기록되었다.
삼별초(三別抄)의 난과 일본 정벌의 법석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모든 뒤풀이가 끝났다. 이제 원나라에 반대하는 고려 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원의 정복 전쟁에 용병으로 징발될 만큼 고려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지배기가 시작된 것이다.
▲ 무엇을 위한 항전인가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항바두리 토성이다.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포장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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