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발전Ⅱ
몽골 지배기가 남긴 ‘혜택’은 새 시대의 주역을 탄생시킨 것 이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건국 초부터 고려는 여러 이민족 국가들의 간섭과 지휘를 받았고 때로는 자발적이거나 반강제로 그들을 섬겼지만 정식으로 남의 지배를 받은 일은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속국 신세를 경험하면서 고려인들, 특히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새삼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속국이나 식민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상류층은 자발적으로 몽골풍을 따랐고 백성들도 대부분 몽골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였으나, 상당수 지식인들은 원나라에 사대하는 풍조를 못마땅히 여겼다. 얼핏 보면 그들의 비판적 자세는 자못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이 몽골 지배기에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이 싹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 지식인이 생리상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권력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지녔으면서도 막상 권력에서는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기 훨씬 전이었으니, 그들이 특별히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태도는 역시 사대의 대상이 몽골이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앞서 묘청(妙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골 지배기 고려의 지식인들은 사대주의 자체를 부정하고자한 게 아니라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랬기에 1290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 가서 주희(朱熹)의 저서들을 필사해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리고 20년 뒤 그의 제자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이 주자학 교과서들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가져왔을 때 고려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열광했다【그 덕분에 안향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한반도 최초의 주자학자로 기록되었으나 사실 그는 주자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공로 이외에 주자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없다. 반면 백이정은 주자학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필생을 바쳤고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이색(李穡, 1328~96)으로 이어지는 고려말 유학자들의 최대 계파를 일구었으므로 사실상 한반도 주자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안향과 백이정은 물론 조선시대에 큰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한국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안향이 배향된 것에 비해 백이정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서원 건립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주희가 유교적 예법을 총정리한 『주자가례』는 그동안 주로 추상적인 이념으로만 전해지던 주자학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소개하는 문헌이었으므로 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른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유교적 예법이 한반도에 널리 보급되는 데는 주자가례의 도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발생한 고려의 주자학은 곧 성리학(性理學)의 대명사가 되면서 결국에는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이념적으로 크게 기여하게 된다(중국의 경우 주자학은 성리학의 일부였으나 조선에서는 유독 주자학만 성리학으로 인정되는데, 그 이유는 하권에서 보기로 하자).
주자학에 열광한 것은 고려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중국의 한족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고려가 주자학을 수입한 루트가 원나라라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한족 왕조 자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원 세조 이후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이 아니었다면 주자학도 그렇게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철학 자체만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주자학은 화이(華夷), 즉 중화세계와 오랑캐 세계를 분명히 구분하려 했기 때문이다(아마 원나라는 중국 대륙을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탓에 주자학의 그런 정치철학적 측면을 간과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 중국의 사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정신사적으로 보면 중국 한족 제국들의 역사는 곧 유학 이념의 발달사와 일치한다. 앞서 말한 바 있듯 옛 주나라 시절에 유학의 근본 이념이 싹텄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이 체계화되었으며, 한나라는 유학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당나라는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함으로써 유교 제국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결국 귀족 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완벽한 유교 제국은 송나라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송나라가 역대 제국들 가운데 가장 물리적으로 허약한 제국이라는 점이다. 완벽한 유교 제국이 가장 약한 제국이라는 사실은 곧 유학 이념의 정치철학적인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지만, 거란과 여진의 ‘오랑캐들’에 의해 나라가 짓밟히는 꼴을 목도한 주희(朱熹)는 엉뚱하게도 그 이유를 유학에서 찾는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은 탄생한 지 2천 년이 지나도록 늘 과거의 경전들에만 매달려 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적이 없다. 그래서 주희는 공자(孔子)가 유학을 체계화한 이래 가장 큰 학문적 변혁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주자학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주자학은 중화 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전통적인 유학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천하의 중심은 중화세계이며, 사방의 이적(夷狄, 오랑캐)들이 중화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자 조화다. 주희는 그 중심을 이(理)로, 주변을 기(氣)로 지칭하면서 화이론을 이기론으로 교묘하게 치장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오랑캐가 지배하는 현실은 그런 우주의 질서가 깨어진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대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주자학이 왜 크게 어필했는지 자명해진다. 몽골 오랑캐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조화가 무너졌음을 말해준다. 우주와 자연은 조만간 본래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할 테고, 결국 오랑캐는 중화세계를 끝내 지배하지 못하고 오랑캐의 고향으로 물러가 주어진 본래의 역할(중화세계의 주변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한족 문명은 북방 이민족 문명에게 잠시 터전을 내주긴 했어도 궁극적으로는 중심의 위치로 컴백하리라는 이야기다. 역대 한족 제국들에 대해 변함없는 사대의 충정을 바쳐 왔던 한반도의 반체제 지식인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사상이 있을까? 그러므로 이 사상이 짧게는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74)의 개혁에, 길게는 조선왕조의 성립에, 더 길게는 오늘날까지 유학 이념이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유학의 도입을 문화적 측면에서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한다면, 이와 비슷한 발전은 역사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록 논리는 다르지만 역사에서도 몽골 지배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외피를 쓴 ‘발전’이 있었다. 무신정권기에 활동한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그 선구자이며, 몽골 지배기에 간행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는 마무리이자 완성에 해당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아마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제목이 달라졌을것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이규보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 영웅 서사시는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동명왕)의 탄생과 생애, 업적,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왕의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 이규보는 내친 김에 시로써 고구려 역사 전체를 서술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나와 있었으나 이규보는 그 공식 역사서에서 생략된 고구려의 전사(前史)에 주목했다. 천제의 아들이자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과감히 역사적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후대에 자주적인 민족 의식이 표출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좀 지나친 칭찬이라 하겠다.
이규보(李奎報)가 직접 밝힌 참고서는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책인데,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이규보의 시대까지 고대 삼국에 관한 비공식 역사서들이 일부 전해졌던 듯하다. 이런 참고서들이 있는데 그는 왜 정식 역사서를 서술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역사가가 아니라 문인이었고 역사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사가와 문인의 차이가 없었고 일찍이 최치원(崔致遠)도 그랬듯이 비공식 역사서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고 보면, 이규보는 사실 김부식(金富軾)의 유교적 사관에 도전하기는커녕 『삼국사기』를 보완한다는 의도를 지닌 데 불과했다.
이 점은 단군신화를 처음으로 다룬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옛 기록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헌적 가치는 대단히 크지만, 두 문헌 역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몽골 지배에 저항한 자주적 민족의식의 발로’라는 거창한 평가를 주기는 어렵다. 단군신화라면 독자적인 한반도 문명을 가리키는 것인데, 왜 자주적인 관점이라 할 수 없는 걸까? 앞서 단군신화가 한반도 토착 문명이 아님은 말한 바 있지만, 굳이 내용을 논하지 않더라도 단군신화를 언급한다고 해서 무조건 민족의식과 결부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유사(遺事)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한다는 의미로 저술된 책이며, 『제왕운기』 역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보잘것없는 문신 집안 출신의 지은이가 무신정권기에 실추된 왕권을 애써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책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두 문헌 모두 『삼국사기』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한 게 아니라 그 사대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이민족 지배의 설움을 달래려 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앞에서 말한 주자학의 취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한 가지 예로 『삼국유사』에서는 전권에 걸쳐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원 황실의 지지를 고려 왕실의 영광이라며 칭송하고 있다).
남의 나라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자주성을 특히 강조하려는 입장이 생겨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유구함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자주성 역시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일연(一然)과 이승휴의 노력(?) 덕분에 우리 역사는 2천 년이나 크게 늘어 이른바 ‘반만 년 역사’가 되었지만, 그것이 실제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라면, 혹은 민족 자주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뿌리깊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상 또 다른 이민족 지배기였던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이었던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은 뒤이므로 사대주의 의식에서는 거의 벗어나지만, 그 대신 일본 제국주의가 당면의 적이므로 항일의 과제가 왜곡된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낳는다. 그 덕분에 우리 역사는 반만 년에서 무려 1만 년까지 늘어난다. 이를테면 1911년에 계연수가 엮었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은 단군 이전에 환국(桓國) 시대가 5천 년 가량 지속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과거에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던 위대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고 한다. 일단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수상쩍다면 오히려 듣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시도는 물론 나무랄 수 없으나 그 목적을 위해 역사 왜곡까지 동원된다면 민족 자주의식은커녕 식민지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을 용인한다면 지금까지 냉소적으로 써온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표현도 정식 용어로 성립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몽골 지배기 식민지적 발전의 수혜자들인 신흥 사대부 세력과 주자학 사상이 불행하게도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주체와 이념이 된다는 사실이다.
▲ 첨단 학문을 배우자 비중화세계인 몽골을 통해서 중화 이데올로기가 수입된 것은 아이러니다. 일종의 ‘식민지적 발전’인 셈인데, 그러나 당시 중국마저도 몽골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忠烈王)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진은 오늘날 개성에 남아 있는 성균관의 모습인데, 공민왕(恭愍王) 때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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