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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시련과 극복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시련과 극복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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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과 극복

 

가마쿠라 바쿠후의 새 주인이 되고 나서도 호조 가문은 몇 차례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호조는 가문의 이름도 도쿠소(得宗)’로 바꾸고 가문의 수장을 싯켄(執權)’이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마냥 도쿠소와 싯켄으로 머물게 놔두지 않았다도쿠소나 켄이나 말뜻으로는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다. 도쿠소는 원래 요시토키의 법명(法名)이었으나 호조 가문의 대명사가 되었고, 켄은 도쿠소의 지배자라는 직책의 명칭이었으나 호조 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이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쇼군은 형식상으로 여전히 바쿠후의 서열 1위였지만 바쿠후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호조의 켄이었다. 조큐의 난 이후 호조에 반대하는 호족 가문들이 단결해 도전해오는가 하면 심지어 쇼군이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쇼군은 원래 바쿠후의 수장이었으나 자기부정인 셈이다).

 

바쿠후는 그때마다 그럭저럭 도전을 물리치고 문제를 해결했으나 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신적인 권위를 지닌 과거의 천황과 달리 바쿠후는 실력만을 밑천으로 삼았으므로 같은 독재라도 천황 시대만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이런 허점을 정신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무사들은 불교와 신사라는 두 가지 신앙을 발달시켰다. 12세기 말에 호넨(法然)이 창시한 정토종은 종래의 귀족 불교와 달리 계율과 교의에 집착하지 않고 염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다. 정토종은 무사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또 신사는 천황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무사들을 정신적으로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에이시키모쿠의 제1조는 바로 신사 숭배였다. 특히 호족들을 비롯한 고케닌들은 바쿠후에 종전과 같은 결집된 충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운도 영 따르지 않았다. 1231년의 기록적인 대기근을 비롯해 대규모의 지진과 태풍, 전염병 등이 잇따르면서 굶어 죽는 사람과 유랑민이 넘쳐나고 도둑 떼가 들끓었다. 유랑민을 잡아 노비로 팔아넘기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자 1240년에는 인신매매 금지법을 제정할 정도였다.

 

 

이것만 해도 끔찍한 사태였으나 진짜 최악의 위기는 바깥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대의 세계 최강 몽골 제국의 침략이다.

 

유사 이래 일본은 외부에서 도움은 받았어도 침략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외부의 도움은커녕 무수히 외침만 겪은 우리 역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고대에 일본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도 한반도의 도래인들이었고, 중국의 당 제국 시대에는 일본이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했다. 굳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입은 피해를 따진다면 7세기 중반 백제가 멸망할 무렵 함선 400척을 파견했다가 전멸당한 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난생처음으로 외적의 침입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외적이란, 아시아는 물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해 유럽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세계 최강의 몽골군이었다.

 

30년에 가까운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물리치고 1258년에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원 제국은 하찮게 본 한반도의 잠재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가 이렇다면 일본은 또 어떨까? 더구나 일본을 공격하려면 물살이 거센 현해탄을 건너야 한다. 원의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는 일단 손대지 않고 코 풀 생각으로 1268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자고 한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바쿠후는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오랜 내전을 겪으며 실력이 는 것이라고는 싸움 기술밖에 없다. 게다가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닌가? 바쿠후는 회의 끝에 그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몽골은 몇 차례 더 사신을 보낸 뒤 1270년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당시 약관의 청년으로 막 바쿠후의 켄 자리에 오른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 1251~1284)는 결연히 전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대몽 항쟁 고려에서 제작된 커다란 몽골군의 군함을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 와 기습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막강한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병사들의 활약보다는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의 덕이 컸다. 2차 세계대전에서 자살 특공대로 악명을 떨친 가미카제라는 명칭은 바로 이 태풍에서 비롯되었다.

 

 

드디어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900척의 함선과 33000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출발했다(우리 역사에는 이것을 여몽 연합군이라고 부르지만 고려군은 몽골에 징발된 것이니 옳은 명칭이 아니다)당시 몽골은 점령지의 군대를 징발해 정복 전쟁을 계속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몽골은 남송인들을 써먹었다. 일본 침략을 준비할 때는 한술 더 떠서 고려에 병선의 제작을 맡겼는데, 이에 동원된 인부와 목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고려로서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젖기도 전에 남의 나라의 전쟁 준비에 제 나라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바친 것이니, 커다란 치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보면 고려는 몽골에 부역해 침략을 도운 용병인 셈이다. 일본 원정군의 고려 측 지휘자는 그전 해인 1273년 몽골이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할 때 책임을 맡은 김방경이었는데, 과연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일본 원정에 임했을까? 20세기 후반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는 베트남에서 미군과 함께 싸운 한국군 병사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원정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순식간에 정복하고 규슈에 상륙했다.

 

단 하루만의 교전으로 일본 무사들의 자신감은 허망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아무리 무림의 고수라 해도 정규군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개인 전술에 능숙한 일본의 무사들은 몽골군의 집단 보병 전술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더구나 생전 본 적이 없는 철포라는 신무기는 가히 경악의 대상이었다. 몽골군의 공격이 하루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일본이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날이 저물자 몽골군은 일단 공격을 멈추고 배로 돌아갔는데, 그때 일본의 구세주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몽골군이 생전 본 적도 없는 신무기, 바로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태풍은 산더미 같은 해일을 동반하면서 정박해 있던 몽골군의 선박을 궤멸시켜버렸다. 군대는 남은 함선들을 추슬러 간신히 귀환했다.

 

하지만 원 세조는 원정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송을 정복한 뒤 그는 1279년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풍의 도움을 잘못 해석해 신이 대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믿은 도키무네는 그 사신을 참수해버렸다. 이로써 2차 원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몽골도 지난번과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래서 세조는 아예 일본 원정을 전담하는 임시 조직을 구성했다. 1280년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 여기서 이란 물론 일본을 가리킨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이번에는 병력을 증강하고 남송의 군대도 동원했다. 4만 명의 몽골과 고려 연합군이 선발대였고, 남송군 10만 명이 후발대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원정군이 하카타(博多)에 상륙했을 때 공교롭게도 또다시 하늘이 일본을 도왔다.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과 폭풍우로 4000척의 함선 중 200척만 남고 모조리 침몰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신이 일본을 지켜주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강적을 물리친 바쿠후는 그 태풍을 신이 보내준 바람, 즉 신풍(神風)이라고 불렀다. 신풍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가미카제(かみかぜ)가 되는데, 이것은 20세기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을 공격한 자살 특공대의 명칭이기도 하다.

 

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정복한 대몽골군이 일본이라는 조그만 섬나라를 정복하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사실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지만). 그 뒤에도 원 세조는 몇 차례 일본을 침략하고자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행하지 못했다. 결국 1294년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일본 원정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권좌에 오른 무사들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시련과 극복

곪아가는 바쿠후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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