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다시 부는 북풍
처음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첫 대면을 한 것은 1218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왔을 때다. 몽골군은 서경 동쪽의 강동성에 거란을 몰아넣고 고려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고민했으나 당시 서북면 원수(元帥)를 맡고 있던 조충(趙沖, 1171~1220)이 군량을 보내자 정부에서도 김취려(金就礪, ?~1234)를 지휘관으로 삼고 병력을 보내 이듬해 1월에 양측이 함께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형식을 취했다(당시 조충은 고려로 보내진 거란 포로들을 북부의 각 주현으로 분산시켜 특정 구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거란장契丹場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 장수들과 두 나라의 서열을 형제관계로 정했다. 그러나 변방에 파견된 장수들이 마음대로 국제관계를 맺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고려의 중앙정부에서 몽골의 동생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거란 - 여진 - 몽골에 이르기까지 이미 북방 유목민족의 동생 노릇을 하는 데는 이골이 난 고려였으나 한 번도 진심으로 형을 받든 적은 없다는 게 고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 판에 새로 섬기게 된 형이 이전의 형들과 달리 오만하고 까탈스럽게 굴 뿐 아니라 동생에게 무리한 조공까지 요구하니 동생의 심기가 뒤틀릴 건 당연하다. 그러나 힘에서 밀리는 동생은 감히 내색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몽골 사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물을 국왕인 고종 앞에서 팽개쳐 버리며 행패를 부리는 데도 동생은 소극적이다 못해 비겁한 태도로 일관한다.
아마 형은 동생과 처음부터 사이좋게 지낼 마음이 없었던 듯하다. 그게 아니면,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극동을 할당받은 몽골의 오치긴이라는 자는 아무리 모욕을 가해도 전혀 싸울 뜻을 내비치지 않는 고려가 오히려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1225년 몽골의 무례한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귀국하던 도중 압록강에서 살해된 사건은 그에게 좋은 빌미가 된다. 고려 정부는 금나라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하지만, 또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 사건을 구실로 몽골은 고려와 ‘혈육관계’를 끊고 침략의 명분을 만들었다.
1230년 오고타이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숙제로 남겨두었던 금나라 정벌을 시작하면서 살리타에게 별도의 군대를 주어 랴오둥의 금나라 주둔군을 소탕하게 했다. 랴오둥을 정벌한 살리타의 군대가 이듬해 여름에 압록강을 넘으면서 이후 30년에 걸친 고려 정벌이 시작되었다.
한족 왕조가 주로 침략한 옛 고구려 시대까지 포함하면, 외국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경우는 벌써 몇 번째일까? 그런데 희한한 일은 거의 매번 침략군은 한반도 왕조의 강력한 수비망에 걸려 반도 북부의 성곽들을 점령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쳐 남쪽으로 진군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뭘까? 물론 수성이 한반도 왕조들의 특기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반도의 성곽들이 거의 대부분 산성인 탓이 크다. 한반도의 성들은 평지가 아니라 중요한 길목 부근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성의 목적이 중국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행정도시의 중심지를 지향한 게 아니라 외침에 대한 방어용 진지로 기능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우리 역사에서 정복을 꿈꾼 경우는 전혀 없다. 정복군주로 유명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조차도 산성을 이용한 랴오둥 수비에 치중했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산꼭대기에 성을 쌓아놓고 기를 쓰고 지키는 데야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정복이 수월할 리 없다. 이렇게 보면 외침을 막아낸 전공으로 역사에 이름이 높은 장수들은 실상 다소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몽골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살리타는 몇 차례 북부의 성곽들을 찔러보다가 이내 공성을 포기하고 곧장 개경을 향해 내달렸다. 다급해진 최우는 서둘러 병사를 모았으나 교활하게도 자신의 친위대 병력인 별초군을 동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산성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데다 알맹이까지 빠진 군대가 전군이 기병인 몽골군을 막을 수는 없다. 몽골군은 가볍게 방어군을 무찌르고 순식간에 개경을 포위했다. 게다가 포위 병력을 그대로 둔 채 남하를 계속한 몽골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궁성은 포위되었고 국토는 유린되고 있다. 이렇게 누가 봐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우(崔瑀)는 항복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항복하는 주체는 상징적 국가대표이자 허수아비인 국왕이니 최우로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예나 지금이나 그늘의 권력자란 이래서 좋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은 고려의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양자는 똑같이 상징적 존재를 허수아비로 앉혀둔 채 실질적 권력을 지니고 국정을 도맡은 신분이었지만, 고려의 무신 집권자가 철저히 비공식적 무대에만 머물려 한 데 비해 일본의 쇼군은 공식적으로도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나중에 보겠지만 몽골 침략에 맞설 때도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상징이라도 고려의 국왕과 일본의 천황은 위상이 달랐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일본의 쇼군은 천황의 혈통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교토를 방문해서 천황에게 문안을 드렸으며, 국가의 상징으로서 천황을 예우했다. 깡패 집단으로 끝난 고려의 무신정권에 비해 일본의 바쿠후 정권이 훨씬 오래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결국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영접하고, 많은 공물과 함께 몽골의 관례에 따라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살리타(Salietai, 撒禮塔)는 고려 측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받은 게 많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살리타가 내준 ‘선물’은 고려가 전혀 고맙게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개경을 포함하여 고려의 서북면 40여 개 성에 다루가치라는 몽골의 총독들을 파견한 것이었으니까(아마 이 성들은 일찍이 조위총이 금나라에 바치려 했던 성들과 일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살리타가 물러가자 그제야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최우가 다시 나왔다. 물론 그가 장막 뒤에서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해법을 구상했고 이제 다시 자기 세상이 되자 그 해법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강화도로 천도하는 엉뚱한 방책이었다.
천도의 근거는 간단하다. 몽골군은 육지에서는 천하무적이지만 선박이 없어 수전(水戰)에는 약하다. 인천 앞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조류의 속도가 빠르므로 몽골군이 건널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운선(漕運船, 조세를 운반하는 선박)이 다니기에는 개경보다 강화도가 더 유리하니까 식량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들은 반대였다. 사실 그런 이유로 도읍을 비좁은 강화도로 옮긴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행위였다. 그러나 최우(崔瑀)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던 야별초 장군 김세충(金世沖, ?~1232)을 죽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가면서 끝내 천도를 관철시킨다. 이렇게 해서 1232년 7월부터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중앙정부는 망명정부로 전락했다.
아무리 고려의 사직과 왕권이 보잘것없다 해도 일국의 왕과 중신들이 국토와 백성들을 버리고 조그만 섬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장기적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억지로 갖다붙인 해석이고 실은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극약처방일 뿐이다. 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한 국왕까지는 인정된다 해도 막후의 실력자까지 배려하지는 않을 게 뻔한 노릇, 따라서 최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최우는 강화도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니 개인적으로 천도의 보람은 컸다. 그러나 고려의 국토와 백성들은 그 천도 때문에 다시 한번 큰 화를 입게 된다.
▲ 섬으로 망명한 고려 정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무신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내뺄 궁리부터 했다. 그가 피신처로 택한 곳은 바로 강화도인데, 일국의 정부가 백성들을 버리고 좁은 섬으로 도망쳐왔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그러나 거기서 30년 가까이 버티게 될 줄은 최우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사진에서 보이는 강화도 고려궁의 모습에서도 망명정부의 초라함이 묻어난다.
무모한 항쟁
설사 강화도 천도가 항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국토와 백성을 버리고 싸우자는 격이니 그건 항쟁이라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항복은 굴욕적인 것이지만 일단 항복을 했으면 자신의 처지와 역할에 충실해야만 실익이라도 거둘 수 있다. 치욕을 씻고 복수를 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수순이다【그런 점에서 강화도 천도를 반대한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日, 1168~1232)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몽골에 사대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현실에서는 단연 그게 더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고집하는 게 기백 있는 태도인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유승단은 강화도로 천도하면 ‘변방의 백성들은 다 죽고 노약자는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비록 개경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 하더라도 백번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항복을 해놓고 나서 항쟁을 하겠다는 고려의 의도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고려 정부에게는 과연 일관된 정책과 노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몽골의 눈에 그런 비상식적인 처사가 거슬리지 않을 리 없다. 천도 두 달 뒤인 1232년 9월에 벌써 살리타는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강화도 망명정권이 그에 응할 리 없으니 전쟁이 재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살리타는 이 기회에 아예 고려의 혼줄을 빼놓을 작정을 한다. 그래서 강화도를 공격하는 대신 분풀이 삼아서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기로 마음먹는다. 지난번에는 충청도까지만 왔던 몽골군이 경상도까지 내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살리타 개인에게는 불행한 선택이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승려 김윤후(金允候)가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살리타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고려는 대구 부근의 부인사에 간직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는 참극을 당했으니 적 사령관의 한 목숨과 맞바꾼 것치고는 혹독한 대가라 하겠다【살리타가 죽자 고려인 중 가장 크게 걱정한 사람은 홍복원(洪福源, 1206~58)이라는 자였다. 그는 살리타의 1차 침략 때 아버지와 함께 몽골에 투항한 이후 내내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협력한 인물이다. 1차전의 결과로 몽골이 관장하게 된 북부 40개 성을 지휘하면서 그는 2차전에서도 몽골의 가이드 노릇을 했는데, 몽골군이 철수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몽골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때마다 매번 참전했으며, 후손들까지도 랴오둥과 만주를 본거지로 삼고 고려 왕조와 대립했다. 오늘날로 치면 매국노인 셈인데,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와 같은 친원파들 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항쟁을 선택한 결과로 고려가 겪어야 할 참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몽골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중국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고려에 대한 응징이 유보되었을 뿐이다. 과연 1234년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 이듬해에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침략하는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일체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파상공세를 취한다(아마도 2차 정복의 드라이브를 건 오고타이의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간도 전보다 훨씬 긴 5년간이었으니 고려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국난이 아닐 수 없다.
▲ 관을 대신한 민 그렇잖아도 무능한 데다 강화도로 도망쳐버린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한 것은 고려 백성들이다. 처인성 전투에서는 부곡민들이 오히려 대몽 항쟁에 앞장섰으며, 승려 김윤후는 고려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적장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이는 쾌거를 올렸다. 이렇게 전란을 맞아 정부가 도망치고 백성이 싸우는 현상은 나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조선 말 의병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사진은 처인성 터다.
비록 각지에서 군민이 합세한 고려 측의 저항을 받았으나 속도만 가끔 느려졌을 뿐 몽골군은 거침없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한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물론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곳 중에는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같은 시기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도시들을 짓밟고 있었으니 가히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구세계의 전체를 초토화시킨 시기라 할 만하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3차전으로 고려는 한 가지 문화재를 만들었고 다른 한 가지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서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게 전자라면(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진 것은 후자다. 그러나 황룡사와 더불어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던 9층탑과 대종, 장육상이 녹아 없어진 것을 팔만대장경이 생긴 것으로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지경이 되자 그동안 나몰라라 하고 버티던 강화도 정부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238년 말에 고종은 사신을 보내 다시 항복의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해 몽골 측은 국왕이 직접 입조할 것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삼아 철군했다. 문제는 고려 정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는 데 급급할 뿐 여전히 항복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화장실에 가기 전과 나온 뒤의 심정은 다르다지만, 수백만 백성들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고려 정부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해서는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사대해 왔으면서도 북방 이민족 왕조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버티는 건 대체 무슨 오기일까?
몽골의 응징이 곧이어 뒤따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몽골 내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1241년 오고타이가 죽자 몽골제국의 중앙정부에서는 제위 계승권을 놓고 혼란과 내분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246년 구유크(Guyuk, 貴由)가 제위를 계승한 뒤 바로 이듬해에 다시 고려 침략이 행해지지만 곧 구유크가 죽어 철군하는 바람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전란도 종결되지 않는다. 몽골 황실에게도 이제 강화도에서 20년이나 버티고 있는 고려 정부는 제법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251년에 즉위한 몽케(Mongke, 蒙哥, 재위 1251~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는데, 최우(崔瑀)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사기꾼의 기질까지 농후한 인물이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판에 살짝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 명백한 사기극에 몽케는 당연히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 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 오자 또 다시 사기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강화도 맞은 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긴 했으나 같은 사기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 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 20만 6천 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고 되어 있으니 사기의 대가는 엄청나다.
국제 사기극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음에도 이를 뉘우치기는 커녕 자신의 집권에만 여념이 없었던 데다 강화도에서도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최항이 병으로 편안하게(?) 죽은 것은, 신이 없거나 아니면 신의 업무 중에 권선징악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항의 서자로 뒤를 이은 최의(崔竩, ?~1258)에게는 그런 은총이 베풀어지지 못했다. 노비를 어머니로 둔 탓인지 일찍이 ‘신분해방’에 눈을 뜬 그는 선비보다 노비를 측근에 두고 중용했으며, 아직 몽골의 전란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권력의 맛을 즐기는 데만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적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 1258년 김준(金俊, ?~1268)과 유경(柳璥, 1211~89)이라는 자들이 최의의 집을 습격해서 그를 암살함으로써 60년에 걸친 최씨 정권은 끝났다. 김준은 무신이고 유경은 문신이므로 시대가 시대인 만큼 권력상 서열은 김준이 위다. 그래서 아직 무신정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나 ‘최씨 고집’이 무너졌으므로 어처구니없는 대몽 항쟁‘ 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 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최종적으로 끝난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관계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론일까? 그러나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으니 결과론은 아니다. 권력 수호 차원에서 무모하게 버틴 무신정권과 뿌리깊은 중화 사상으로 ‘오랑캐’에 대한 항복에 망설였던 개경 귀족들이 합작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급기야는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더욱이 항복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영토에서 나타난다. 1258년 동북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그것을 빌미로 화주(和州,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해 함경도 땅을 고려에게서 빼앗았다. 또 1269년에는 서경의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평안도 땅을 차지했다. 서경을 중시하라는 왕건의 유시는 애시당초 포기한 터였지만, 초기부터 내내 관리에 애를 먹던 북부의 영토를 떼어준 것에 아마도 왕과 개경 귀족들은 시원섭섭해하지 않았을까?
▲ 잃은 보물과 얻은 보물 몽골 침략으로 고려는 신라시대의 거찰인 황룡사를 잃었고 팔만대장경을 얻었다. 사진은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각이다. 보물 하나를 잃고 다른 보물 하나를 만든 셈인데,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황룡사와 대장경을 맞바꾼 것은 밑지는 장사라 하겠다. 더구나 전란의 와중에서 불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대장경을 주조한 것은 아무리 13세기의 발상이라 해도 순진(?)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을 정도다.
반군과 용병
마치 종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몽골 황제 몽케 칸과 고려 국왕 고종은 1259년에 함께 죽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황제와 왕이라는 신분 차이보다도 컸다. 오히려 고종과 비슷한 삶을 산 인물은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종이다. 두 임금이 같은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같은 운명을 암시한 걸까? 고려의 고종은 내내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고 30년을 강화도에서 보내야 했으며, 조선의 고종은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아버지와 마누라에 휘둘려 바지저고리로 지내다가 급기야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까지 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고종 모두 예순일곱 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은 채 죽었다.
그래도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달리 몽골 식민지 시대에는 사직이나마 보존한 것을 감안하면 고려의 고종이 덜 불행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속국이라는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고종이 죽자 몽골에 가 있던 태자가 돌아와 원종(元宗, 재위 1259~74)으로 즉위했다. 일단 왕통은 그럭저럭 이었지만 그에게 실권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그에게 주어진 특명은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 본연의 임무가 아닌 개경 환도일 따름이다. 그러나 왕 자신은 아무 힘도 없지만 그의 등 뒤엔 몽골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다. 최씨 정권을 타도하고 난 뒤에도 무신 집권을 이어가려는 김준 일당이 소홀히 여긴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유일한 권력의 원천은 몽골이라는 것을 확신한 원종은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몽골에 협력한다. 우선 개경 환도를 위해 그는 1268년 개경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한다. 그러자 김준은 당연히 반대했고, 김준과 왕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해서 또 다른 무신 임연(林衍, ?~1270)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다. 물론 그도 환도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래서 그는 원종을 폐위하고 원종의 동생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 된 지금까지도 집권 무신이 국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몽골로 도망친 원종은 4개월 만에 당당히 돌아와 복위했고, 못난 임연은 몽골 본국의 문책에 고민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 ?~1270)는 멋모르고,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았다가 몇 개월도 못 가서 원종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니, 이것이 무신정권의 최종적인 몰락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어도 아직 뒤풀이가 남아 있다. 1270년 원종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했는데, 40년 만의 환도를 기념한 것은 경축 행사가 아니라 반란이다. 그 주역은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고 실업자 처지가 되어버린 군대, 즉 별초군(別抄軍)이다. 그동안 손 안에 가지고 놀던 정부를 놓쳤으니 이제 군대는 완전한 깡패 조직에 불과하다. 새로 뽑힌 보스 배중손(裵仲孫, ?~1271)은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강화도에 남아 개경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삼별초는 몽골 침략기에 대몽 항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기에 역사 교과서에는 그들이 마치 우국지사인 것처럼 평가되어 있지만, 사실 그들은 받들어 섬기던 집권 무신이 제거된 데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출발부터 삼별초는 최우(崔瑀)가 친위대로 편성했던 만큼 무신정권의 사병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들의 대몽 항쟁도 기본적으로 강화도 정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므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의 봉기에 일부 민중이 지지를 보낸 것은 몽골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 고려 정부를 자처한 삼별초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문서다. 성격은 반란군이지만 삼별초는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어 대몽 항쟁의 주체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고려 정부로 자칭했다.
애초에 배중손이 믿었던 것은 미처 강화도에서 나오지 못한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는 등 부산 떠는 틈을 타 인질들은 재빨리 육지로 도망쳐 나온다. 그렇다면 삼별초(三別抄)도 더 이상 강화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남쪽으로 가 진도에 근거지를 트는데, 그들이 기세를 떨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박을 이용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제주도에서 거제도까지 남해상의 섬들을 점령하니 옛 장보고(張保皐)가 부럽지 않다. 특히 항구들을 장악하고 중앙으로 가는 조운을 방해한 것은 개경 정부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준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반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의 건국이 될 판이니, 개경 정부는 장보고 시대 경주 정부의 심정이 어땠을지 공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무기력한 면에서는 개경 정부도 9세기의 경주 정부에 못지 않다. 염장(閻長)의 역할을 해준 것은 역시 몽골군이었다. 하긴, 고려의 군대는 반란군이 되었으니 개경 정부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었겠지만, 몰락한 무신들 대신 다시 문신으로 군 사령관이 된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1271년 총공세를 펼친 끝에 마침내 진도를 함락시키고 배중손을 잡아죽였다. 이후 삼별초(三別抄)는 김통정(金通精, ?~1273)을 우두머리로 삼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저항을 계속하다가 2년 뒤에 최종적으로 진압된다.
명백한 반란임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일단 몽골에 대한 반감 때문이지만 그밖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世祖, 재위 1260~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1260년 몽골의 제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정복왕조에서 벗어나 중국식 제국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민족 왕조로서 장기적인 생존과 발달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황제의 시호를 중국식으로 고치고(그래서 그는 몽골제국으로 보면 5대 황제이지만 원나라로 따지면 초대 황제가 된다) 이름만 남아 있던 남송을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쿠빌라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전까지의 어느 중화 제국도 이루지 못한 동아시아 전역의 통일을 시도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본마저 정복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천 앞바다의 물살조차 부담스럽게 여겼던 몽골군이 거친 현해탄을 건너기란 불가능하다. 뱃멀미는 물론이고 당장 병력 수송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의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선박을 건조하도록 명한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진압된 뒤 1274년 드디어 몽골군은 남송군과 고려군을 거느리고 현해탄을 건너는데(당시 고려군 사령관은 김방경이었다), 무려 900척의 대선단이었으니 선박을 만들고 군량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고려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집권자인 호조 도키무네는 겨우 스물세 살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무신 집권자들처럼 교활하고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천황을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않고 결연하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록 때맞춰 불어온 태풍으로 원정군의 선박들이 깨져나가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지만 가마쿠라에서 멀리 규슈까지 군대를 파견한 기개는 대단했다. 정복의 한을 풀지 못한 쿠빌라이는 1280년 개경에 정동행성(征東行省, 말 그대로 동쪽의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관청이다)을 설치하고, 이듬해 무려 14만 명의 병력과 4천 척의 함대로 다시 규슈에 상륙했는데, 불행히도 또 태풍이 불어닥쳐 200척의 선박만 남기고 모조리 침몰해 버렸고 인명 피해도 10만 명에 달했다【두 차례의 태풍으로 국난을 넘긴 덕분에 당시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 불렀다. 1274년의 위기를 넘기자 호조 도키무네(Hojo Tokimune, 北條時宗, 1251~1284)는 “신이 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면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을 과감히 죽여 버리기도 했다. 물론 신이 일본을 수호할 리는 만무지만, 어쨌든 여기서 비롯되어 나중에 일본을 통일하게 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라 주장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서양 선교사들이 전파하려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기 위해 ‘신국론’을 들먹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차 대전시 일본 공군의 자살 특공대를 가미카제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는 이렇게 깊고 오래된 것이다】. 그 덕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함께 세계제국 몽골이 정복하려 했다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으로 기록되었다.
삼별초(三別抄)의 난과 일본 정벌의 법석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모든 뒤풀이가 끝났다. 이제 원나라에 반대하는 고려 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원의 정복 전쟁에 용병으로 징발될 만큼 고려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지배기가 시작된 것이다.
▲ 무엇을 위한 항전인가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항바두리 토성이다.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포장되었다.
황제의 사위들
2차 일본 정벌이 전개되기 1년 전인 1279년 남송이 멸망함으로써 고려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정작 충심을 바쳐 섬기고 싶은 대상인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오랑캐 몽골을 ‘모국’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고려의 신세도 여간 딱한 게 아니다. 그나마 남송처럼 오랑캐의 손에 멸망하는 것보다는 오랑캐의 속국으로라도 존속하는 편이 낫다고 할까? 물론 몽골의 관점에서는 고려가 남송과 달리 변방에 불과했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만.
사실 고려 왕실은 불만이 없다. 왕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원나라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 덕분에 지긋지긋하던 무신집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 왕권?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개국 초부터 주변 강대국들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 이민족 왕조들에 반강제로나마 사대해 온 처지가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오히려 고려의 왕들은 개경 귀족들보다 중화 사상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1274년 6월 아버지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 베이징)를 떠나 고려로 돌아오는 원종의 태자는 왕실의 고난이 아버지 대에서 끝났다는 후련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하다. 그는 무려 100년 만에 무신정권의 영향력 없이 즉위하는 왕이니까. 그러나 그는 바로 지난 달에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이제 고려의 왕이기에 앞서 제국의 사위라는 신분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그 전까지의 고려 왕들과는 달리 독립국의 왕을 뜻하는 ‘종(宗)’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의 직함만 인정되어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를 시작으로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일곱 명의 고려 왕들은 모두 세자 시절에 원 나라에서 살면서 몽골식 이름을 얻고 원나라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그 중 여섯 명은 죽은 뒤에 충(忠, 충성)자가 붙은 ‘왕’의 시호를 받았다(당시 원나라는 정복국의 왕에게 황녀를 시집보내는 게 관례였으니까 고려만이 ‘부마국’이었던 것은 아니다)【‘충자 항렬’의 여섯 왕들은 모두 태자가 아닌 세자였다. 독립국의 왕위계승자를 태자(太子)라고 부르니까 세자(世子)는 그보다 한 급 낮은 호칭이다. 그밖에도 이 시기의 고려 왕들은 전 시대와 다른 호칭과 용어들을 썼다. 이를테면 왕이 자신을 가리킬 때 쓰는 짐(朕)이라는 말도 고(孤)로, 폐하(陛下)도 전하(殿下)로 격하되었다(폐陛란 계단을 뜻하므로 폐하는 독립 군주의 용어지만 전殿은 황궁을 뜻하므로 전하란 황제 휘하에 있는 군주를 가리킨다). 몽골 지배기에만 이런 용어들을 썼다면 지금 우리에게 그렇듯 익숙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시대 내내 왕위계승권자는 태자가 아닌 세자였으며, 왕은 스스로를 ‘고’라 칭했고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불렀다. 게다가 조선은 1897년 일본의 괴뢰 제국인 대한제국 시절을 제외하고는 독자 연호를 쓴 적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는 고려 말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독립국이 아니었던 셈이다】.
기대와는 달리 즉위 초부터 일본 정벌 뒷바라지에 시달린 충렬왕이었으나 사위로서 장인의 뜻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재위 기간 중 그는 열 차례 이상이나 원의 황실을 방문할 정도로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사위였다. 따라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을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를 감찰사(監察司)로 바꾸고 6부를 4사(司)로 개편한 데는 원의 요구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속국이므로 6부六部라는 이름도 6조六曹로 격하되었는데, 이 명칭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기관들의 기능은 그대로지만 이름에서 보듯이 성(省)이 부(府)로, 원(院)과 대(臺)가 사(司)로 한 급씩 격하된 것은 속국 행정부의 체제임을 말해준다. 여기에 일본 정벌이 포기된 이후에도 정동행성이 계속 남아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부마국임에도 믿을 수 없다는 원나라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왕에게 더 중요한 신분은 고려의 왕보다 황제의 사위다. 1297년 아내인 제국대장공주가 죽었을 때 그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세자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달려왔는데, 자신의 슬픔을 달래는 방식이 좀 색달랐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죽인 것이다. 아마도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만사에 흥미를 잃고 이듬해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준다. 하긴, 요즘 정치인들이 골프라면 미치는 것처럼 몽골에 있을 때 익힌 매 사냥에 빠져 있었던 그였으니 왕위 따위에 초연(?)한 태도가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왕위에 오르게 된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은 적어도 아버지처럼 무기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즉위 직후 그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마련하고 대대적으로 실행하고자 했다. 정방을 폐지하고 한림원을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쳐 인사권을 부여한 것이라든가, 귀족과 호족들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척결하고자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자들이 출세하는 루트를 차단한다든가, 새 행정기관들을 신설해서 속국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보인 것은 당연히 모국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다. 때마침 아내인 계국대장공주가 질투까지 하는 바람에 그는 개혁의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한 채 드라이브를 중단하게 된다【몽골의 공주는 충선왕과 왕비 조씨의 금슬이 좋은 것에 불만을 품었는데, 실은 조씨가 먼저 충선왕과 결혼했으니 후처가 전처를 시기한 셈이다(그래도 정실은 엄연히 몽골 공주였으므로 그녀가 낳은 아들만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충선왕은 1292년에 고려에서 조씨와 결혼했고,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계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들였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서 충선왕이 조씨와 더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공주는 원 황실에 서신을 보내 조씨가 자신을 저주한다고 모함했다. 일개 아녀자의 질투라면 모르겠으되 몽골 공주의 불평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결국 조씨는 친정아버지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대도로 압송되는 비극을 당했고 충선왕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당시 개경 궁궐에는 조씨가 공주를 저주한다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여기에는 아마 친원파 귀족들의 책동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7개월 만에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었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고려 왕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은 그 다음에도 연출된다.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 충선왕(忠宣王)은 몽골에서 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지만, 겨우 두 달만에 원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고려 왕은 다시 궐위 상태가 되었고, 더구나 국왕의 호사스런 해외 생활비를 대느라 국가 재정도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고려 정부만이 아니라 원나라 황실에서도 왕의 귀국을 종용했으나 충선왕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시 귀국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밟은 다음 원나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고려 왕위는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떠맡긴 왕위를 영문도 모르고 덥석 받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30, 1332~39)은 아마도 후회스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왕위가 더 싫어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만주의 여러 민족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던 원 황실은 고려가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자 새로운 방책을 구상했다. 만주를 관장하는 별도의 왕, 즉 심양왕(瀋陽王)을 두는 것이다(瀋陽을 중국어로 읽으면 지금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 선양이 된다). 최초의 심양왕은 바로 1308년 충렬왕이 죽었을 때 귀국하지 않고 버틴 충선왕이다. 그러나 고려 왕위까지 마다한 그가 심양왕이라고 제대로 맡을 리 없다. 그는 곧 조카인 연안군 고(暠)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충숙왕이 고려의 왕위를 잇게 되자 ‘두 왕’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충숙왕은 아버지처럼 튀려 하지 않고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재위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옷 색깔로 백성들의 신분을 구별하라는 원의 명령에도 그대로 따랐고, 사심관을 폐지하라는 지시도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심양왕 고가 고려 왕위에 흑심을 품고 황실에 그를 무고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그만 그런 정도의 직무 수행마저도 싫증이 난다. 게다가 그 때문에 황실의 소환령을 받아 5년간이나 대도에서 살다가 와보니 더욱 짜증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심양왕이 원 황실에 아예 고려라는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에 합병하자는 제안까지 냈던 것이다. 왕위에 초연한 것은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내력이 아니던가? 결국 충숙왕은 1330년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로 가 버린다【그런 분위기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당시 고려 왕실에서 정신을 바짝 차렸더라면 오늘날 만주는 중국 땅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실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지 않은 이유는 고려로 하여금 만주의 민족들이 반란을 꾀하지 않게 제어하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원나라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까지는 영토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 그랬듯이 만주까지는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고려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함께 아우를 만한 역량이 있어야 했겠지만, 세계 제국 원나라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 위상으로 보면 그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자연스럽게 만주는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터이다. 비록 고려는 속국의 신분이긴 했으나 당시 만주는 원나라에게나, 몽골을 타도한 명나라에게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심양왕은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적 계승을 현실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렇게 해서 열다섯 살에 왕이 된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32, 1339~44)에게 나라를 다스릴 경륜은커녕 황실의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할 능력조차 기대할 수 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색잡기와 사냥에 빠져 있던 충혜왕은 결국 2년간 재위한 뒤 폐위되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컴백했다가 7년 뒤에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결국 충렬왕부터 충혜왕까지 식민지 시대 네 명의 왕들은 모두 두 번씩이나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왕위가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 그들 개인적으로도 불운이었겠지만, 그런 왕들을 둔 당시 고려 백성들과 그런 기록을 지닌 우리 역사는 더욱 불운하다고 하겠다. 왕실을 둘러싼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났으나, 이후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48)과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51)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불과 몇 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으므로 중 자가 들어간 왕치고 이름값이라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 몽골에 맞선 일본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일본 전역이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달아난 고려의 무신정권과 달리 일본의 동업자는 과감히 몽골군에 맞섰다. 물론 강력한 몽골 기마병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독자적인 황제(천황)를 모시는 독립국이라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림은 그 전투 장면인데, 이 선박은 고려 백성들이 건조했다.
식민지적 발전Ⅰ
일국의 왕실에서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았을 정도라면 나라꼴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장장 30년간의 무모한 대몽 항쟁으로 전 국토는 피폐해졌고 더 무모한 일본 정벌의 준비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기업은 망해도 사장은 살아남는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격언만이 아니다. 왕실이 그랬듯이 고려 사회의 지배층도 나라와 백성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영화를 누렸다.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을 누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진국의 첨단 유행을 맨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상류층이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몽골 복장을 몸에 걸치고 몽골식 변발을 했다. 게다가 그들은 몽골식 이름을 만들고 몽골어를 한 마디라도 배우려 애썼으니, 오늘날 망국적인 영어 학습 열풍의 원조는 이 시대다【몽골 지배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이런 상류층의 풍조는 점차 일반에게도 퍼져 나갔다. 정치와 제도는 식민지 시대가 끝나면 바뀌지만 풍속은 원래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도입된 몽골식 풍속, 이른바 ‘몽골풍’은 몽골 지배기가 끝난 뒤에도 살아남았는데, 조선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게 꽤 많다. 이를테면 여자들의 족두리,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 볼에 찍는 연지, 귀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 등이 모두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밖에 왕의 밥상을 수라라고 부르는 것, 장사치나 벼슬아치처럼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 ‘치[赤]’ 자를 붙이는 것도 몽골풍이다. 심지어 투전 같은 오락이나 줄타기 같은 기예까지 몽골에서 도입된 풍속이었으니, 몽골 지배기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고유의(?) 풍속이라는 게 과연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기야, 문익점(文益漸, 1329~98)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붓대 속에 목화 씨를 넣어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른바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없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가 되면서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중앙 정치가 실종되었으므로 이제 고려의 상류층은 정치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따라서 그 자유가 선진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으로 나타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현상을 발생케 한 더 중요한 배경은 그들의 경제적인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른바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이루어 정치와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 귀족이 선도한 몽골풍 사대의 역사가 오랜 고려인들은 언제 몽골에 항전했느냐는 듯이 쉽게 몽골의 습속을 받아들였다. 그림에서 보듯이 몽골 복식이나 매 사냥이 유행한 것을 ‘몽골풍’이라 부르는데, 고려 귀족들이 이 유행을 선도했다. 그래도 문화적 측면이라면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나쁘다 할 수 없겠지만, 친원파 모리배들이 득세한 것은 ‘해방’ 후 고려사회의 치명적인 독소로 남았다.
정치가 허물어지면 그 틈을 노려 득세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몽골 지배기에 떵떵거렸지만 그 뿌리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할 무렵, 바로 무신정권 시대에 이미 싹텄다. 당대 최고의 재산은 뭐니뭐니해도 토지, 따라서 그들의 전략은 토지 겸병이다. 전시과(田柴科)의 근본적인 결함(관리들의 토지 세습으로 토지가 부족해지는 현상)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정치의 기강이 살아있으면 그럭저럭 제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공권력으로 수조권(收租權)이 세습되는 관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들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치부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공권력 자체가 혼탁해진 마당에 전시과(田柴科)가 더 이상 유지될 리 없다.
그러자 세도가들은 각종 편법을 구사해서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한다. 수조지는 소유지로 바꾸고, 미약한 양반 가문이나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는 강탈한다. 심지어 하급 관리들이 탈법적으로 토지를 갈취하면, 세도가들은 그것을 무마해주는 대신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기도 한다(여기에는 세도가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권력자인 사원들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이런 식으로 토지가 차츰 세도가들에게 겸병되면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불법적 수조권자들 때문에 죽어나고, 국가 재정은 세원 부족으로 허덕인다. 당시 민란이 잦았던 데는 이런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세도가들은 이렇게 긁어모은 토지를 나 양민들에게 경작시키고 생산물을 수취다. 이것이 바로 ‘농장(農莊)’이지만, 그 과 달리 목가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대지주의 농장을 경작하는 농민들을 전호(佃戶)라 불렀는데, 이들은 나중에 소작인더 일반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장차 세기 중반까지 악명을 떨치게 되는 농민 수탈 구조인 소작제도의 원형이 것이다. 당시 전호들은 농장주에게 신분상로도 예속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생산물의 1/2이라는 엄청난 소작료를 물어야 했다.
토지를 빼앗긴 양민들은 전호가 되어 해지고, 아직 농장에 편입되지 않은 농민들은 한층 과중해진 세 부담에 피폐해지며, 관료들은 봉급을 받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인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에 고려 왕조가 망하지 않고 버틴다면 오히려 그게 더 희한할 지경이다. 당연히 망했어야 할 고려 왕조의 수명을 늘려준 건 바로 몽골이다.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는 굳이 ‘망할 필요가 없는’ 왕조, 즉 원나라의 식민지 지방정권이 되었으니까(바꿔 말하면 몽골에 의해 정복당한 것으로 고려는 이미 멸망한 왕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도 식민지적 발전이라 해야 할까??
그랬으니 식민지 시대에 그런 문제점이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사실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현상은 더욱 증폭되고 확산된다. 고려 왕실 자체가 독립 정권이 아닌 판에 정치 무대라고 해서 손대지 못할 영역일 수 없다. 그래서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성장한 세도가들은 정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라고 불리는 신종 족속들이다. 개국 초기에는 호족, 다음에는 외척, 그 다음에는 무신, 또 그 다음에는 권문세족이 차례로 내정을 주물렀으니, 고려를 과연 ‘왕국’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처음에는 한족의 송, 다음에는 거란의 요, 그 다음에는 여진의 금, 또 그 다음에는 몽골의 원나라를 차례로 모국처럼 섬겼으니, 그런 고려를 과연 ‘나라’라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런 회의 섞인 시선은 후대인들의 몫일 뿐이고 당대를 지배한 권문세족은 경제적 부를 누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정치에서도 고려 식민지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하기야, 왕은 황제의 사위일 뿐 실질적인 권력자는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왕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그나마 모든 국정을 그들이 맡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공식적인 정치 참여를 위한 메커니즘을 만들게 되는데,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바꾼 게 그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병마사란 원래 변방의 군사 문제를 다루던 회의체였으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설치되는 임시적인 성격을 지닌 기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개편한 도평의사사는 군사 문제만이 아니라 국정 전반을 취급하게 되었고, 회의체가 아닌 집행기관으로 발전했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구성원이 대폭 늘어 3품 이상의 관리 70~8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정기구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도평의사사는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다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의정부議政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 멤버의 대부분이 권문세족들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신정권에게 배운 수법일까? 권문세족은 자기들끼리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서로 혼맥을 통해 끈끈한 이해관계를 유지하며, 과거보다는 음서를 통해 지위와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등 철저한 ‘문민독재(文民獨裁)’로 일관한다. 당대에는 그런 권력형 부조리가 큰 문제였으리라. 그러나 후대의 관점에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로 인해 대단히 좋지 않은 역사적 선례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권문세족들은 적극적인 친원파였다【여기서 권문세족과 무신정권기 이전까지 고려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전통적인 개경 귀족의 차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물론 권문세족들 중에는 개경 귀족 출신도 많으니까 양자는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집단의 큰 차이는 개경 귀족들이 유학을 숭상한 반면 권문세족들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는 아마도 권문세족들이 토지 겸병으로 농장을 늘려나가는 과정에서 사원 세력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권문세족들은 개경 귀족들과 달리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 않고, 거부감 없이 몽골 지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비롯한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관들에 접촉해서 연고를 맺으려 했고, 심지어 원나라의 고관들과 혼맥을 구축하기도 했다. 원래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주요 공물로서 귀족 집안의 처녀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마지못해 그에 따랐으나 권문세족들이 득세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원나라의 지배층과 인연을 맺는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운이 좋아 자기 집안의 딸이 원나라 황실의 첩실로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 가문 전체가 크게 뜰 수 있었으니 아마 단기간에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나라와 운명공동체이므로 미래도 함께 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원나라가 영원히 고려를 지배한다면 권문세족의 미래도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당시 그들은 그러리라고 굳게 믿었겠지만(일제 치하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식민지 지배가 종식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머잖아 몽골은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아울러 한반도를 죄던 손아귀도 놓게 된다. 그에 따라 식민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에게 눌려 있던 신흥 사대부 세력이 개혁을 주도하게 되고 나아가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새 시대를 주도할 세력이 물밑에서 자라난 게 또 하나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해야 할까?
▲ 제주도 말 목장 몽골이 징발하는 군마를 충당하기 위해 고려 정부는 제주도에 대규모 말 목장을 조성했다. 제주도에는 삼국시대부터 작고 힘센 토착 말이 있었는데, 몽고말들과 피가 섞여 오늘날 조랑말의 순수 혈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림은 조선시대 제주도 말 목장이다.
식민지적 발전Ⅱ
몽골 지배기가 남긴 ‘혜택’은 새 시대의 주역을 탄생시킨 것 이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건국 초부터 고려는 여러 이민족 국가들의 간섭과 지휘를 받았고 때로는 자발적이거나 반강제로 그들을 섬겼지만 정식으로 남의 지배를 받은 일은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속국 신세를 경험하면서 고려인들, 특히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새삼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속국이나 식민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상류층은 자발적으로 몽골풍을 따랐고 백성들도 대부분 몽골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였으나, 상당수 지식인들은 원나라에 사대하는 풍조를 못마땅히 여겼다. 얼핏 보면 그들의 비판적 자세는 자못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실제로 많은 역사가들이 몽골 지배기에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이 싹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 지식인이 생리상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권력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지녔으면서도 막상 권력에서는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기 훨씬 전이었으니, 그들이 특별히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태도는 역시 사대의 대상이 몽골이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앞서 묘청(妙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골 지배기 고려의 지식인들은 사대주의 자체를 부정하고자한 게 아니라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랬기에 1290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 가서 주희(朱熹)의 저서들을 필사해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리고 20년 뒤 그의 제자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이 주자학 교과서들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가져왔을 때 고려의 지식인들은 당연히 열광했다【그 덕분에 안향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한반도 최초의 주자학자로 기록되었으나 사실 그는 주자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공로 이외에 주자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없다. 반면 백이정은 주자학을 연구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필생을 바쳤고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이색(李穡, 1328~96)으로 이어지는 고려말 유학자들의 최대 계파를 일구었으므로 사실상 한반도 주자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안향과 백이정은 물론 조선시대에 큰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한국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안향이 배향된 것에 비해 백이정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서원 건립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주희가 유교적 예법을 총정리한 『주자가례』는 그동안 주로 추상적인 이념으로만 전해지던 주자학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소개하는 문헌이었으므로 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른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유교적 예법이 한반도에 널리 보급되는 데는 주자가례의 도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발생한 고려의 주자학은 곧 성리학(性理學)의 대명사가 되면서 결국에는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이념적으로 크게 기여하게 된다(중국의 경우 주자학은 성리학의 일부였으나 조선에서는 유독 주자학만 성리학으로 인정되는데, 그 이유는 하권에서 보기로 하자).
주자학에 열광한 것은 고려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중국의 한족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고려가 주자학을 수입한 루트가 원나라라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한족 왕조 자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원 세조 이후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이 아니었다면 주자학도 그렇게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철학 자체만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주자학은 화이(華夷), 즉 중화세계와 오랑캐 세계를 분명히 구분하려 했기 때문이다(아마 원나라는 중국 대륙을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탓에 주자학의 그런 정치철학적 측면을 간과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 중국의 사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정신사적으로 보면 중국 한족 제국들의 역사는 곧 유학 이념의 발달사와 일치한다. 앞서 말한 바 있듯 옛 주나라 시절에 유학의 근본 이념이 싹텄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이 체계화되었으며, 한나라는 유학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당나라는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함으로써 유교 제국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결국 귀족 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완벽한 유교 제국은 송나라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송나라가 역대 제국들 가운데 가장 물리적으로 허약한 제국이라는 점이다. 완벽한 유교 제국이 가장 약한 제국이라는 사실은 곧 유학 이념의 정치철학적인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지만, 거란과 여진의 ‘오랑캐들’에 의해 나라가 짓밟히는 꼴을 목도한 주희(朱熹)는 엉뚱하게도 그 이유를 유학에서 찾는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은 탄생한 지 2천 년이 지나도록 늘 과거의 경전들에만 매달려 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적이 없다. 그래서 주희는 공자(孔子)가 유학을 체계화한 이래 가장 큰 학문적 변혁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주자학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주자학은 중화 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전통적인 유학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천하의 중심은 중화세계이며, 사방의 이적(夷狄, 오랑캐)들이 중화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자 조화다. 주희는 그 중심을 이(理)로, 주변을 기(氣)로 지칭하면서 화이론을 이기론으로 교묘하게 치장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오랑캐가 지배하는 현실은 그런 우주의 질서가 깨어진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대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주자학이 왜 크게 어필했는지 자명해진다. 몽골 오랑캐가 지배하는 이 세상은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조화가 무너졌음을 말해준다. 우주와 자연은 조만간 본래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할 테고, 결국 오랑캐는 중화세계를 끝내 지배하지 못하고 오랑캐의 고향으로 물러가 주어진 본래의 역할(중화세계의 주변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한족 문명은 북방 이민족 문명에게 잠시 터전을 내주긴 했어도 궁극적으로는 중심의 위치로 컴백하리라는 이야기다. 역대 한족 제국들에 대해 변함없는 사대의 충정을 바쳐 왔던 한반도의 반체제 지식인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사상이 있을까? 그러므로 이 사상이 짧게는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74)의 개혁에, 길게는 조선왕조의 성립에, 더 길게는 오늘날까지 유학 이념이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유학의 도입을 문화적 측면에서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한다면, 이와 비슷한 발전은 역사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록 논리는 다르지만 역사에서도 몽골 지배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외피를 쓴 ‘발전’이 있었다. 무신정권기에 활동한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그 선구자이며, 몽골 지배기에 간행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는 마무리이자 완성에 해당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아마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제목이 달라졌을것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이규보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 영웅 서사시는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동명왕)의 탄생과 생애, 업적,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왕의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 이규보는 내친 김에 시로써 고구려 역사 전체를 서술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나와 있었으나 이규보는 그 공식 역사서에서 생략된 고구려의 전사(前史)에 주목했다. 천제의 아들이자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과감히 역사적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후대에 자주적인 민족 의식이 표출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좀 지나친 칭찬이라 하겠다.
이규보(李奎報)가 직접 밝힌 참고서는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책인데,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이규보의 시대까지 고대 삼국에 관한 비공식 역사서들이 일부 전해졌던 듯하다. 이런 참고서들이 있는데 그는 왜 정식 역사서를 서술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역사가가 아니라 문인이었고 역사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사가와 문인의 차이가 없었고 일찍이 최치원(崔致遠)도 그랬듯이 비공식 역사서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고 보면, 이규보는 사실 김부식(金富軾)의 유교적 사관에 도전하기는커녕 『삼국사기』를 보완한다는 의도를 지닌 데 불과했다.
이 점은 단군신화를 처음으로 다룬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옛 기록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헌적 가치는 대단히 크지만, 두 문헌 역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몽골 지배에 저항한 자주적 민족의식의 발로’라는 거창한 평가를 주기는 어렵다. 단군신화라면 독자적인 한반도 문명을 가리키는 것인데, 왜 자주적인 관점이라 할 수 없는 걸까? 앞서 단군신화가 한반도 토착 문명이 아님은 말한 바 있지만, 굳이 내용을 논하지 않더라도 단군신화를 언급한다고 해서 무조건 민족의식과 결부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유사(遺事)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한다는 의미로 저술된 책이며, 『제왕운기』 역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보잘것없는 문신 집안 출신의 지은이가 무신정권기에 실추된 왕권을 애써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책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두 문헌 모두 『삼국사기』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한 게 아니라 그 사대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이민족 지배의 설움을 달래려 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앞에서 말한 주자학의 취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한 가지 예로 『삼국유사』에서는 전권에 걸쳐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원 황실의 지지를 고려 왕실의 영광이라며 칭송하고 있다).
남의 나라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자주성을 특히 강조하려는 입장이 생겨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유구함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자주성 역시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일연(一然)과 이승휴의 노력(?) 덕분에 우리 역사는 2천 년이나 크게 늘어 이른바 ‘반만 년 역사’가 되었지만, 그것이 실제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라면, 혹은 민족 자주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뿌리깊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상 또 다른 이민족 지배기였던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이었던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은 뒤이므로 사대주의 의식에서는 거의 벗어나지만, 그 대신 일본 제국주의가 당면의 적이므로 항일의 과제가 왜곡된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낳는다. 그 덕분에 우리 역사는 반만 년에서 무려 1만 년까지 늘어난다. 이를테면 1911년에 계연수가 엮었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은 단군 이전에 환국(桓國) 시대가 5천 년 가량 지속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과거에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던 위대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고 한다. 일단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수상쩍다면 오히려 듣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시도는 물론 나무랄 수 없으나 그 목적을 위해 역사 왜곡까지 동원된다면 민족 자주의식은커녕 식민지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을 용인한다면 지금까지 냉소적으로 써온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표현도 정식 용어로 성립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몽골 지배기 식민지적 발전의 수혜자들인 신흥 사대부 세력과 주자학 사상이 불행하게도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주체와 이념이 된다는 사실이다.
▲ 첨단 학문을 배우자 비중화세계인 몽골을 통해서 중화 이데올로기가 수입된 것은 아이러니다. 일종의 ‘식민지적 발전’인 셈인데, 그러나 당시 중국마저도 몽골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忠烈王)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진은 오늘날 개성에 남아 있는 성균관의 모습인데, 공민왕(恭愍王) 때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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