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다시 부는 북풍
처음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첫 대면을 한 것은 1218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왔을 때다. 몽골군은 서경 동쪽의 강동성에 거란을 몰아넣고 고려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고민했으나 당시 서북면 원수(元帥)를 맡고 있던 조충(趙沖, 1171~1220)이 군량을 보내자 정부에서도 김취려(金就礪, ?~1234)를 지휘관으로 삼고 병력을 보내 이듬해 1월에 양측이 함께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형식을 취했다(당시 조충은 고려로 보내진 거란 포로들을 북부의 각 주현으로 분산시켜 특정 구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거란장契丹場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 장수들과 두 나라의 서열을 형제관계로 정했다. 그러나 변방에 파견된 장수들이 마음대로 국제관계를 맺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고려의 중앙정부에서 몽골의 동생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거란 - 여진 - 몽골에 이르기까지 이미 북방 유목민족의 동생 노릇을 하는 데는 이골이 난 고려였으나 한 번도 진심으로 형을 받든 적은 없다는 게 고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 판에 새로 섬기게 된 형이 이전의 형들과 달리 오만하고 까탈스럽게 굴 뿐 아니라 동생에게 무리한 조공까지 요구하니 동생의 심기가 뒤틀릴 건 당연하다. 그러나 힘에서 밀리는 동생은 감히 내색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몽골 사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물을 국왕인 고종 앞에서 팽개쳐 버리며 행패를 부리는 데도 동생은 소극적이다 못해 비겁한 태도로 일관한다.
아마 형은 동생과 처음부터 사이좋게 지낼 마음이 없었던 듯하다. 그게 아니면,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극동을 할당받은 몽골의 오치긴이라는 자는 아무리 모욕을 가해도 전혀 싸울 뜻을 내비치지 않는 고려가 오히려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1225년 몽골의 무례한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귀국하던 도중 압록강에서 살해된 사건은 그에게 좋은 빌미가 된다. 고려 정부는 금나라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하지만, 또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 사건을 구실로 몽골은 고려와 ‘혈육관계’를 끊고 침략의 명분을 만들었다.
1230년 오고타이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숙제로 남겨두었던 금나라 정벌을 시작하면서 살리타에게 별도의 군대를 주어 랴오둥의 금나라 주둔군을 소탕하게 했다. 랴오둥을 정벌한 살리타의 군대가 이듬해 여름에 압록강을 넘으면서 이후 30년에 걸친 고려 정벌이 시작되었다.
한족 왕조가 주로 침략한 옛 고구려 시대까지 포함하면, 외국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경우는 벌써 몇 번째일까? 그런데 희한한 일은 거의 매번 침략군은 한반도 왕조의 강력한 수비망에 걸려 반도 북부의 성곽들을 점령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쳐 남쪽으로 진군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뭘까? 물론 수성이 한반도 왕조들의 특기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반도의 성곽들이 거의 대부분 산성인 탓이 크다. 한반도의 성들은 평지가 아니라 중요한 길목 부근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성의 목적이 중국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행정도시의 중심지를 지향한 게 아니라 외침에 대한 방어용 진지로 기능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우리 역사에서 정복을 꿈꾼 경우는 전혀 없다. 정복군주로 유명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조차도 산성을 이용한 랴오둥 수비에 치중했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산꼭대기에 성을 쌓아놓고 기를 쓰고 지키는 데야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정복이 수월할 리 없다. 이렇게 보면 외침을 막아낸 전공으로 역사에 이름이 높은 장수들은 실상 다소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몽골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살리타는 몇 차례 북부의 성곽들을 찔러보다가 이내 공성을 포기하고 곧장 개경을 향해 내달렸다. 다급해진 최우는 서둘러 병사를 모았으나 교활하게도 자신의 친위대 병력인 별초군을 동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산성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데다 알맹이까지 빠진 군대가 전군이 기병인 몽골군을 막을 수는 없다. 몽골군은 가볍게 방어군을 무찌르고 순식간에 개경을 포위했다. 게다가 포위 병력을 그대로 둔 채 남하를 계속한 몽골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궁성은 포위되었고 국토는 유린되고 있다. 이렇게 누가 봐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우(崔瑀)는 항복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항복하는 주체는 상징적 국가대표이자 허수아비인 국왕이니 최우로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예나 지금이나 그늘의 권력자란 이래서 좋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은 고려의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양자는 똑같이 상징적 존재를 허수아비로 앉혀둔 채 실질적 권력을 지니고 국정을 도맡은 신분이었지만, 고려의 무신 집권자가 철저히 비공식적 무대에만 머물려 한 데 비해 일본의 쇼군은 공식적으로도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나중에 보겠지만 몽골 침략에 맞설 때도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상징이라도 고려의 국왕과 일본의 천황은 위상이 달랐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일본의 쇼군은 천황의 혈통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교토를 방문해서 천황에게 문안을 드렸으며, 국가의 상징으로서 천황을 예우했다. 깡패 집단으로 끝난 고려의 무신정권에 비해 일본의 바쿠후 정권이 훨씬 오래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결국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영접하고, 많은 공물과 함께 몽골의 관례에 따라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살리타(Salietai, 撒禮塔)는 고려 측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받은 게 많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살리타가 내준 ‘선물’은 고려가 전혀 고맙게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개경을 포함하여 고려의 서북면 40여 개 성에 다루가치라는 몽골의 총독들을 파견한 것이었으니까(아마 이 성들은 일찍이 조위총이 금나라에 바치려 했던 성들과 일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살리타가 물러가자 그제야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최우가 다시 나왔다. 물론 그가 장막 뒤에서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해법을 구상했고 이제 다시 자기 세상이 되자 그 해법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강화도로 천도하는 엉뚱한 방책이었다.
천도의 근거는 간단하다. 몽골군은 육지에서는 천하무적이지만 선박이 없어 수전(水戰)에는 약하다. 인천 앞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조류의 속도가 빠르므로 몽골군이 건널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운선(漕運船, 조세를 운반하는 선박)이 다니기에는 개경보다 강화도가 더 유리하니까 식량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들은 반대였다. 사실 그런 이유로 도읍을 비좁은 강화도로 옮긴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행위였다. 그러나 최우(崔瑀)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던 야별초 장군 김세충(金世沖, ?~1232)을 죽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가면서 끝내 천도를 관철시킨다. 이렇게 해서 1232년 7월부터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중앙정부는 망명정부로 전락했다.
아무리 고려의 사직과 왕권이 보잘것없다 해도 일국의 왕과 중신들이 국토와 백성들을 버리고 조그만 섬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장기적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억지로 갖다붙인 해석이고 실은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극약처방일 뿐이다. 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한 국왕까지는 인정된다 해도 막후의 실력자까지 배려하지는 않을 게 뻔한 노릇, 따라서 최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최우는 강화도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니 개인적으로 천도의 보람은 컸다. 그러나 고려의 국토와 백성들은 그 천도 때문에 다시 한번 큰 화를 입게 된다.
▲ 섬으로 망명한 고려 정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무신집권자인 최우(崔瑀)는 내뺄 궁리부터 했다. 그가 피신처로 택한 곳은 바로 강화도인데, 일국의 정부가 백성들을 버리고 좁은 섬으로 도망쳐왔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그러나 거기서 30년 가까이 버티게 될 줄은 최우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사진에서 보이는 강화도 고려궁의 모습에서도 망명정부의 초라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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