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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황제의 사위들③: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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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황제의 사위들③: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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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사위들

 

 

그러나 고려 왕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은 그 다음에도 연출된다.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 충선왕(忠宣王)은 몽골에서 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지만, 겨우 두 달만에 원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고려 왕은 다시 궐위 상태가 되었고, 더구나 국왕의 호사스런 해외 생활비를 대느라 국가 재정도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고려 정부만이 아니라 원나라 황실에서도 왕의 귀국을 종용했으나 충선왕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시 귀국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밟은 다음 원나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고려 왕위는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떠맡긴 왕위를 영문도 모르고 덥석 받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 ~ 30, 1332 ~ 39)은 아마도 후회스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왕위가 더 싫어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만주의 여러 민족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던 원 황실은 고려가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자 새로운 방책을 구상했다. 만주를 관장하는 별도의 왕, 즉 심양왕(瀋陽王)을 두는 것이다(瀋陽을 중국어로 읽으면 지금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 선양이 된다). 최초의 심양왕은 바로 1308년 충렬왕이 죽었을 때 귀국하지 않고 버틴 충선왕이다. 그러나 고려 왕위까지 마다한 그가 심양왕이라고 제대로 맡을 리 없다. 그는 곧 조카인 연안군 고()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충숙왕이 고려의 왕위를 잇게 되자 두 왕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충숙왕은 아버지처럼 튀려 하지 않고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재위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옷 색깔로 백성들의 신분을 구별하라는 원의 명령에도 그대로 따랐고, 사심관을 폐지하라는 지시도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심양왕 고가 고려 왕위에 흑심을 품고 황실에 그를 무고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그만 그런 정도의 직무 수행마저도 싫증이 난다. 게다가 그 때문에 황실의 소환령을 받아 5년간이나 대도에서 살다가 와보니 더욱 짜증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심양왕이 원 황실에 아예 고려라는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에 합병하자는 제안까지 냈던 것이다. 왕위에 초연한 것은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내력이 아니던가? 결국 충숙왕은 1330년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로 가 버린다그런 분위기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당시 고려 왕실에서 정신을 바짝 차렸더라면 오늘날 만주는 중국 땅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실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지 않은 이유는 고려로 하여금 만주의 민족들이 반란을 꾀하지 않게 제어하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원나라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까지는 영토화하는 데 성공했으나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 그랬듯이 만주까지는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고려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함께 아우를 만한 역량이 있어야 했겠지만, 세계 제국 원나라의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 위상으로 보면 그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자연스럽게 만주는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터이다. 비록 고려는 속국의 신분이긴 했으나 당시 만주는 원나라에게나, 몽골을 타도한 명나라에게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심양왕은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적 계승을 현실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렇게 해서 열다섯 살에 왕이 된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 ~ 32, 1339 ~ 44)에게 나라를 다스릴 경륜은커녕 황실의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할 능력조차 기대할 수 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색잡기와 사냥에 빠져 있던 충혜왕은 결국 2년간 재위한 뒤 폐위되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컴백했다가 7년 뒤에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결국 충렬왕부터 충혜왕까지 식민지 시대 네 명의 왕들은 모두 두 번씩이나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왕위가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 그들 개인적으로도 불운이었겠지만, 그런 왕들을 둔 당시 고려 백성들과 그런 기록을 지닌 우리 역사는 더욱 불운하다고 하겠다. 왕실을 둘러싼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났으나, 이후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 ~ 48)과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 ~ 51)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불과 몇 년밖에 재위하지 못했으므로 중 자가 들어간 왕치고 이름값이라도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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