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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이냐, 건국이냐(공양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이냐, 건국이냐(공양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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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이냐, 건국이냐

 

 

이색(李穡)이 창왕의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이 사대부와 손을 맞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은 최영과 운명을 함께 했고(여기에는 원나라가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점도 배경이 되었다), 사대부 세력은 즉각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접근해서 신군부와 인연을 맺으려 들었다. 그동안 물리력에 취약점이 있어 권력에 다가가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이제 한풀이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대부는 동질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권문세족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들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었으므로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이해관계로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저마다 색깔을 드러낼 것은 당연하다. 개혁이라는 대의에서는 모두가 같은 색이지만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관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대부는 점차 온건파와 급진파의 두 가지 그룹으로 묶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창왕의 옹립을 두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다.

 

조민수와 이색(李穡)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데서 보듯이 아직까지 주도적인 세력은 온건파다. 존경받는 학자이자 관료였던 이색과, 그에게서 당대 최고의 주자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몽주(鄭夢周)가 리더다. 지만 급진파에는 미완의 대기(大器)가 브레인으로 속해 있다. 그는 바로 정도전(鄭道傳)이다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나이는 같았어도 직급에서는 엘리트 코스를 걸은 정몽주에 비해 한참 아래였다. 두 사람은 1384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동행한 적이 있는데, 정도전은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 문서담당자)이었다. 당시는 명과 고려의 관계가 최악이었고 그 전에 보낸 사신조차 명 황실에서 투옥해 버리는 바람에 누구도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과감히 사신을 자임해서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는데, 여기에는 명 황실에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한 정도전(鄭道傳)의 탁월한 문장력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당시 명 태조는 정도전의 표문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찰떡궁합이었던 두 사람은 곧 다른 배를 타게 된다. 주자학자답게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던 정몽주(鄭夢周)에 비해 정도전은 현실적인 대세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성향이 달랐던 탓이었을 게다.

 

유배 생활의 끝 무렵인 1383년에 그는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의 막사로 찾아가 세상사를 논한 적이 있는데, 그 만남은 정도전이 일찍부터 이성계를 새 시대의 리더로 점찍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두 살 터울의 두 사람은 아마 고려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성토하면서 쉽게 친해졌을 텐데, 혹시 그 자리에서 장차 있을 쿠데타를 구상하지 않았을까? 그때 그들은 서로 브레인과 물리력으로 역할 분담할 것을 결의한 것은 아닐까?

 

쿠데타 성공 이후 더욱 사이가 돈독해진 정도전(鄭道傳)과 이성계에게 조준(趙浚, 1346~1405)이라는 또 하나의 인물이 찾아온다. 그는 문신이었으나 왜구 토벌로 제법 이름이 알려졌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우왕의 폐위를 도모할 만큼 대담하고 급진적인 성향이었으니 이성계의 진영이 여러 모로 마음에 맞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급진파의 삼총사가 탄생했다.

 

조준의 영입은 예상외의 성과를 가져왔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려 사회의 모순이 토지제도에 있다고 본 그는 개인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전제개혁안으로 만들어 제출했다. 그의 개혁안은 관리가 사망하고 나서도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는 수조권(收租權) 제도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 것이었으니, 내용으로 보면 옳긴 해도 그다지 참신한 점은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제안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무신정권과 권문세족의 오랜 지배가 끝나고 나자 이제 전국의 토지는 거의 다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새 관리는커녕 기존의 관리에게조차도 줄 봉급이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래서 공민왕(恭愍王)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에 열을 올린 것이지만, 이제는 기득권층이 불법으로 소유한 토지를 교통정리하는 정도의 조치로는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다. 기존의 모든 토지 소유관계를 무효화하고 밑그림부터 새로 그려야만 토지제도와 국가 재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새 나라가 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무르익는다.

 

 

 

 

예상했던 대로 기득권층은 물론 신진사대부들조차도 조준의 전제 개혁안에는 반대 일색이다. 비양심적인 세력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으니 당연히 반대였으나 양심적인 세력도 개혁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급진파 삼총사가 보기에 그것은 개혁도 하기 전에 개혁피로증을 걱정하는 격이다.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 상소가 잇따르자 이성계는 준비해둔 칼을 끄집어낸다. 당시 시중은 이색(李穡)이었고 이성계는 부총리격인 수시중(守侍中)이었지만 권력과 물리력을 지니고 있으니 시중은커녕 국왕도 두렵지 않다. 그는 재빨리 반대 세력의 핵인 조민수를 탄핵해서 유배를 보낸 다음 창왕을 폐위시킨다. 이렇듯 준비된 수순이 일사불란하게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삼총사의 탁월한 팀워크 덕분이다.

 

이성계는 일단 왕위를 이을 왕족을 물색하는데, 어지간히도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모양이다. 무려 200년 전의 왕인 신종의 7대손을 찾아 내서 옹립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마흔다섯 살의 중늙은이로 즉위한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92)은 아마 자신이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국왕으로서 그의 업무는 이제 시중에 오른 이성계의 비위를 맞추고 개혁 삼총사의 제안을 인준하는 것뿐이다. 그 첫 업무가 하필 유배된 우왕과 창왕의 처형장에 사인을 한 것이라서 기분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로써 급진파는 원하던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었다. 남은 과제(과제라기보다 절차라고 해야겠지만)는 단 두 가지, 하나는 온건파의 제거이고 다른 하나는 새 왕조의 건국이다. 친명이라는 대외 노선과 개혁이라는 대내 정책에서 목표가 같았던 두 파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급진파는 이미 개혁의 범위를 넘어섰다. 개혁 삼총사는 건국 삼총사로 바뀌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을 오히려 제거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때마침 그 과제를 달성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최영의 조카인 김저(金佇, ?~1389)가 유배 생활을 하던 우왕을 비밀리에 만나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곽충보(郭忠輔, ?~1403)라는 자가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김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이성계의 심복이었던 곽충보는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이 되었으니, 사람의 목숨이 한 끝 차이로 갈라지는 난세였다). 없던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호박이 굴러든 격이다. 삼총사는 우왕의 장인이자 전제개혁안을 반대하는 대표자인 이림(李琳, ?~1391)에게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투옥해 버린다.

 

 

 

 

건국의 또 다른 계기는 명나라에서 온다. 명나라에 파견되어 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무신들이 13905월 명 황실에 야릇한 보고를 올린 것이다. 내용인즉슨 공양왕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며 이성계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침공할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닌 허위보고였지만 가뜩이나 신군부 정권을 바라보는 명나라의 눈길이 곱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삼총사가 그대로 덮어둘 리 없다. 개경에서는 곧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져 온건파의 태두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이숭인(李崇仁, 1349~92), 변안렬(邊安烈, ?~1390), 우현보(禹玄寶, 1333~1400) 등이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더라면 조선 건국은 아마 실제보다 2년 앞선 1390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 보고를 무고로 결론짓고 윤이와 이초를 유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짓자 사태는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숙청된 인물들이 다시 복직되고 숙청을 주도한 정도전이 오히려 유배된 것이다.

 

급진파로서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최대의 위기, 그러나 위기는 곧 찬스다. 코너에 몰린 이성계는 아직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장악하는 것만 이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먼저 해둘 조치가 있다. 그것은 이미 재가가 난 조준의 전제개혁안을 하루빨리 시행하는 일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포함된 온건파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한 것은 과연 새 왕조를 개창할 만한 리더로서의 냉정침착한 태도다. 그것이 1391년의 과전법(科田法)인데,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만 온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온건파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은 치명타였다(과전법은 고려 말에 제정되었으나 조선의 토지제도로 기능하므로 하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왕권을 장악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마지막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수시중인 정몽주였다고려 말 왕들과의 관련성에서 볼 때도 정몽주(鄭夢周)가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공민왕(恭愍王)이 살해된 뒤 우왕은 권문세족의 대표인 이인임(李仁任)이 옹립했고, 다음 창왕은 신진사대부의 온건파 대표인 이색이 옹립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공양왕의 옹립에 찬성했다. 이는 고려의 중앙권력이 구 세력에서 새 세력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왕 때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고 공양왕 때 이색(李穡)이 몰락했으니 정몽주(鄭夢周)는 그 다음이 자기 차례 라는 것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온건파 최후의 보루로 남은 정몽주는 신군부가 왕위마저 찬탈하려는 기색을 감지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미 공공연하게 왕조 교체가 운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한사코 왕조는 그대로 두고 개혁으로써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자세로 일관한다. 그래서 1391년에 이성계의 브레인인 정도전(鄭道傳)과 심복인 남은(南誾, 1354~98)을 유배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마 그도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한때 개혁의 동지였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는 사건이 생기자 정몽주는 그가 개경을 비운 지금이 건국 삼총사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라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성계에게는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비록 다섯째 아들이긴 하지만 아버지처럼 장차 왕위를 꿈꾸는 스물다섯 살의 야심찬 젊은이 이방원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이성계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보람은 아주 컸다. 문병을 핑계로 정세를 엿보러 왔던 정몽주가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趙英珪, ?~1395)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된 것이다. 그간 많은 피를 손에 묻혀왔던 이성계라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섰더라면 아마 오랫동안 우의를 다져온 정몽주(鄭夢周)를 그렇듯 처참하게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어쨌든 이제 새 왕조 건국의 도정에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다. 13927월 드디어 이성계는 공양왕을 퇴출시키고 군신들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비록 그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고 굳이 왕조 교체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나(조선이라는 국호가 채택되는 것은 그 이듬해다), 고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왕실의 성이 바뀌었으니 누구도 곧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을 의심치 않았다.

 

 

충신의 피 마지막까지 고려를 구하기 위해 애쓴 정몽주(鄭夢周)는 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미 고려 왕실은 사망선고를 받았으므로 설사 정몽주가 죽지 않았다 해도 고려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신군부에 용감히 맞선 그의 저항은 1979년 쿠데타 세력에게 순순히 정권을 내주고 이후에도 침묵하다가 끝내 비밀을 안고 죽은 어느 대통령을 부끄럽게 만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수구와 진보

구국의 쿠데타?

개혁이냐, 건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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