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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 6부 표류하는 고려,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6부 표류하는 고려,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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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권문세족의 태생적 결함은 결국 현실로 드러났다. 원나라와 운명공동체로 출발한 그들이었으니 몰락도 원나라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원나라가 급작스럽게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세조 이래 원 황실은 한화 정책에 열심이었으나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고 유목문명이 농경문명을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제위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권력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했던 세조 이후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10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웠던 원 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 사치를 일삼았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가지가 엎치고 덮치는 법이다. 제국의 상층부가 약화되는 것과 동시에 하부에서도 제국을 몰락시키는 주요 동력이 생겨난다. 한족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비록 한화 정책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몽골의 한족 지배는 몽골 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기간의 민족 차별에 불만이 커진 한족은 원나라의 통치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각지에서 봉기하기 시작한다. 선두주자는 남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 금세 반원(反元) 항쟁의 핵심으로 성장한 홍건적의 우두머리인 주원장(朱元璋, 1328~98)은 먼저 난징을 함락하여 강남을 장악한 뒤 북벌을 감행한다. 마침내 1368년에 대도가 함락되면서 원나라는 100여 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고향인 몽골 초원으로 달아났다.

 

원 황실의 명으로 어린 조카 충정왕을 대신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恭愍王)은 아마 어린 시절 대도에 머물 때부터 원나라가 쇠퇴하는 기미를 알아차렸던 듯하다. 즉위 이듬해에 곧바로 몽골 복식과 변발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건 곧이어 전개될 개혁 드라이브의 방아쇠였다. 아직 멸망하지 않은 원나라를 타깃으로 삼을 수는 없으니 개혁의 대상은 당연히 국내의 친원파 기득권층, 즉 권문세족이다. 공민왕은 정방(政房)을 대폭 개편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기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그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혁신 조치를 실행한다(전민변정도감은 1269년 원종 때 처음 설치된 이래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임시로 설치되곤 했는데, 공민왕 때는 세 차례나 설치되었다). 그러나 손놓고 기득권을 빼앗긴다면 기득권층이라는 이름을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원나라의 쇠퇴가 국내 친원파에게까지 피부로 느껴지는 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권세가들은 공민왕의 개혁에 거세게 반발했고 심지어 반란까지 꾀하기에 이른다.

 

 

그 기세에 공민왕(恭愍王)은 잠시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1356년에는 2차 개혁에 나섰다. 원 황실과 혼맥을 구축하고 세도를 부리던 골수 친원파 기철(奇轍, ?~1356)이 반란을 꾀한 것은 오히려 공민왕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기씨 집안을 처단한 것을 기화로 공민왕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최종적으로 폐지하고, 100년간이나 존속하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제거하는 한편, 원나라식 관제를 고려의 옛 관제로 되돌리고 원나라의 연호마저 폐지함으로써 개혁의 성격이 반원에 있음을 천명한다(첨의부도 다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권세가들의 저항도 저항이려니와 개혁의 주도 세력이 왕실 외척인 탓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략해 오는 바람에 개혁의 환경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략이 다소 가라앉은 뒤 곧바로 3차 개혁을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신분상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개혁 주체를 기용한다. 그는 바로 노비를 어머니로 둔 신돈(辛旽, ?~1371)이라는 승려였다.

 

기철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측근 무신 김원명(金元命, ?~1370)의 추천으로 신돈을 알게 된 공민왕은 마침내 개혁의 리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밝힌 신돈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니 큰일을 맡길 만하다.’ 바꿔 말하면 노비 출신의 승려라는 신돈(辛旽)의 보잘것없는 신분을 오히려 후하게 평가한 셈인데, 신분이라는 요소로써 중용을 결정할 만큼 당시 공민왕(恭愍王)의 처지가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하기는, 권문세족들이 득시글거리는 데다 홍건적의 침략으로 신흥 무장 세력마저 발흥하고 있는 고려의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하려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신돈 같은 신분밖에 없었을 것이다1365년 공민왕(恭愍王)은 사랑하던 아내인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져 신돈에게 개혁을 맡겼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이미 두 차례의 개혁에서 공민왕의 성향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신임은 대단히 두터웠던 모양이다. 신돈(辛旽)은 중국에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이라 불리면서 행차할 때는 국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으로 불교계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당대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보우(普愚, 1301~82)는 그를 요사스런 승려라고 혹평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신돈은 공민왕이 말한 것처럼 친당이 없는 독자적인 인물이었던 듯하다.

 

과연 1365년 신돈은 임용되자마자 인사권을 장악하고 권력의 기반을 다진 다음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는데, 타깃은 단연 권문세족이다. 우선 권문세족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국정의 모든 결정권을 궁궐 안으로 가져온다. 이것으로 권세가들은 일단 정치적 영향력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다음 개혁 조치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1차 개혁에서도 시도된 조치였지만 이번에는 신돈 자신이 판사로 참여해서 직접 토지 심사를 맡았으니 그 강도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찬탈한 토지는 속속 농민들에게 반환되었으며, 그 덕분에 신돈(辛旽)은 백성들에게서 성인이 나타났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난세의 문화군주 몽골이 패망할 조짐을 알아챈 공민왕(恭愍王)은 즉각 고려사회의 대대적인 수술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공민왕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갖춘 데다 천산대렵도라는 작품까지 그렸을 만큼 문화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군주가 암살된 것은 늘 개혁이 좌절되고 인물이 제거되는 우리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를 말해준다.

 

 

그러나 단지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게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개혁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사회의 새로운 주도층을 만들어내야 한다. 신돈(辛旽)이 낙점한 그 신진 세력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1367년 그는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짓고(성균관은 충렬왕(忠烈王) 때 처음 설치되었으나 당시에는 기존의 학교들을 모아 성균관이라 이름지은 정도였다) 공자천하의 스승이라 칭하면서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한다. 그들이 바로 신흥 학문인 주자학을 숭상하는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이다(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신진사류新進士類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조선과의 연관성을 기해 사대부로 통일하기로 하자).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을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독자적 세력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그가 개혁의 리더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니 신돈의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장점은 오히려 그의 몰락과 개혁의 실패를 부르게 된다. 우선 권문세족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신돈의 개혁 드라이브가 급진적으로 흐르자 권세가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를 천거했던 김원명까지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래도 새로운 개혁 세력이 튼튼했다면 아마 그들의 반동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을 전공한 신진 사대부들이 승려인 그를 100퍼센트 충심으로 대했을 리는 없다. 1367년 신돈(辛旽)이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까지 낳자 오히려 그들은 신돈의 사생활을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나선다.

 

원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참신한 독자 노선이 무기였던 신돈은 급속히 방향 감각을 잃었다. 권문세족의 집요한 저항에 대해 그는 서경 천도를 계획한다거나 충숙왕 때 이미 폐지된 사심관(事審官)을 부활시켜 맞불을 놓으려 했으나 그것은 개혁을 주창한 그가 먼저 복고를 부르짖는 격이다. 결국 그 대응책들이 실패하면서 신돈은 최대의 지지자인 공민왕(恭愍王)의 신임마저 잃고 만다. 1371년 그는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그것으로 공민왕의 개혁, 아울러 고려 최후의 몸부림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이제 고려는 몰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수구와 진보

 

 

신돈(辛旽)이 실각의 조짐을 보이던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실로 오랜만에 한족 제국인 명()을 세웠다. 그리고 신돈이 처형된 뒤 고려의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이 장악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중국의 신흥국 명나라와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고려의 관계가 장차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반원을 내세웠던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명 태조(太祖, 재위 1368~98)에 즉위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명나라를 섬길 뜻을 전한다(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또 다른 모국을 찾은 격이니, 고려의 반원 운동이 결코 자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대해 명 태조는 공민왕의 책봉 문서와 달력을 고려로 보냈으며,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사대관계가 설정되었다. 원래부터 고려의 차세대를 주도할 세력이 신진사대부라고 보았던 공민왕이었으니 중국의 한족 왕조에게 접근하는 것은 이념적으로도 일관된 태도다. 게다가 공민왕은 원나라의 잔당인 동녕부(東寧府)를 공략하여 랴오둥으로 내몰고 한반도 북부를 수복함으로써 영토적인 이득도 거둔다.

 

이렇듯 민첩한 공민왕의 순발력에,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친원을 고수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때마침 신돈이 그들과 왕의 공동의 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와중에서 그들은 공민왕(恭愍王)에게 배척당하고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돈이 실각한 뒤 먼저 제거된 것은 권문세족이 아니라 공민왕이었다. 그간의 모든 개혁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유가 개혁 주도 세력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데 있다고 본 공민왕의 판단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1372년에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관을 설치하는데, 좋은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을 모아 장차 개혁을 이끌 인재로 양성하려는 목적이었으니 여기까지도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자제위 소속의 홍륜(洪倫)이라는 자가 공민왕(恭愍王)의 후궁과 간통을 저지르는 사태가 일어나자 공민왕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을 죽이려다가 그만 홍륜과 결탁한 최만생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권문세족은 손도 대지 않고 시원하게 코를 푼 셈이었다. 열 살짜리 우왕(禑王, 재위 1375~88)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고려 왕조의 격을 낮추기 위한 역사 조작일 가능성이 짙다(고려사는 공민왕의 자제위도 음행을 일삼는 문제있는 집단으로 왜곡하고 있다). 후사가 없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제거한 뒤 전에 신돈이 소개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음을 공표하고 그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가 후계자로 교육시켰는데, 그가 바로 우왕이다. 물론 그 여자가 신돈의 첩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랬다면 공민왕이 굳이 그 아들을 후사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을 옹립하고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 권신 이인임(李仁任, ?~1388)은 즉각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공민왕이 일궈놓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취소하고 멀리 고비 사막 북쪽으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당(북원)에 접근한 것이다. 때마침 얼마 전에 공민왕의 독단적인 동녕부(東寧府) 정벌로 고려에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던 명나라는 더욱 태도가 싸늘해진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시대착오적인 자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내의 신진사대부다. 그 대변인 격인 정몽주(鄭夢周, 1337~92)이색(李穡)의 제자로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도전(鄭道傳, 1337~98)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가면서도 친명(親明)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바야흐로 고려 내 권력구도는 본격적으로 수구 대 진보의 전선으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수구파와 대립되는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멤버로 볼 때 그 전선은 권문세족 대 신진사대부이며,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다.

 

왕권이 사실상 실종된 상황에서 두 세력이 다툼을 벌인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물리력일 것이다. 그 점에서 수구 세력은 훨씬 앞선다. 홍건적 토벌로 전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다 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른 최영(崔瑩, 1316~88)이 바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변수가 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최영과 더불어 개경에까지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왜구 토벌에는 전문가라할 신흥 무장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그 변수다북쪽에서 침략하는 홍건적과 남쪽에서 약탈하는 왜구는 당시 고려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홍건적은 중국 내 반원 운동에서 발생했지만 왜구는 왜 출현한 걸까? 사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남해안을 침략했으니 낯선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고려 말에 특히 왜구가 극성을 부린 데는 일본 내의 사정이 관련돼 있다.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가 붕괴하면서 일본에서는 그 뒤를 이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천황 세력이 각각 별도의 천황을 옹립하면서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약 60년 동안 남북조시대라 부르는 분열기에 접어든다. 중앙 권력이 확고하지 못한 이 혼란기를 틈타 왜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왜구들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동해안까지 휩쓸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우왕의 치세 14년간 왜구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무려 378회였다고 한다.

 

사실 가문의 배경으로 보면 이성계는 친원과 반원에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원나라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소속 장수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을 때 총대를 거꾸로 메고 고려군에 내응해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그런 그가 조선을 세운 것은 어찌 보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친 박정희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므로 이성계는 아버지 대에서부터 비로소 정식 고려 백성이 된 셈이니 고려 왕조에 대한 각별한 애국심이 있을 리 없다. 양 손에 떡을 쥐고 망설이던 그가 노선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상관인 최영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도 몰랐겠지만 그 사소한 갈등은 최영에 대적할 만한 물리력을 물색하던 사대부 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새 왕조의 건국이라는 원대한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

 

 

 

 

구국의 쿠데타?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와 친원파가 장악하고 있는 고려,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두 나라의 관계는 결국 영토 분쟁으로 번진다. 갑자기 웬 영토 문제일까? 사실 여기에는 가깝게는 100, 멀게는 고려의 개국 초기부터 수백 년간에 달하는 역사가 관련되어 있다. 우선 명나라는 원나라를 정복한 만큼 원나라의 옛 영토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정당한 주장이니까 고려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의 그 옛 영토 중에 고려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에 속했던 땅이 쟁점 지역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몽골 지배가 시작된 이래 함경도와 평안도는 원나라의 두 지배기관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전까지 고려의 영토였던 것을 원나라가 강탈한 결과다. 그랬기에 공민왕(恭愍王)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고려의 생각일 뿐이고 명나라에서 보면 또 달라진다. 어쨌거나 원나라 시절에 한반도 북부는 원나라의 영토였고 명나라는 원나라를 대체한 왕조이므로 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게다가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진 이유는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그 지역은 고려의 영토라고도 할 수 없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한반도 북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확실히 영토화하지 못했으며, 중기에는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할 정도로 그 지역에 대한 소유 의식이 약했다. 급기야 몽골 지배기에는 아예 그 지역을 포기해 버렸다가까이 보면 원나라가 이 지역을 영토화한 탓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만, 조금 더 멀리 보면 고려 초기에 여러 차례 정벌과 영토 확장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확고히 영토화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멀리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 미완성인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7세기 이후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제한되면서 한반도 북부는 늘소유권이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신라가 건국된 이래 고려 말까지 한반도 왕조는 1400년 동안 꾸준히 영토 확장에 성공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신라가 탄생할 무렵 지금의 경상북도에 국한되어 있던 영토가 고려 말에는 압록강 유역에까지 이르렀으니까. 결국 역사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왕건의 유시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과정이다(이 문제는 오늘날 독도 소유권 분쟁과 닮은 데가 있다.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았다면 그런 영토 문제가 생겨났을까?).

 

그러나 고려 정부도 못난 조상만 탓할 자격은 없다. 몽골이 물러가고 난 뒤에도 친원파가 득세하는 사태가 없었더라면 명나라도 굳이 그 문제를 꼬투리로 삼진 않았을 테니까. 고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명나라는 드디어 그 영토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물론 땅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 고려 정부를 제압하겠다는 의도다), 1387년에 철령(강원도 북부의 고개) 이북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원나라가 관할하던 한반도 북부를 명나라에 반환하라는 것인데, 노환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이인임(李仁任)에 뒤이어 고려의 권좌에 있던 최영은 당연히 결사 반대다. 우리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교훈을 남긴 그였으나 역시 영토 문제는 황금과 달랐을까? 아니, 그보다는 아마 수구적인 친원 성향을 지닌 데다 홍건적이라면 이를 갈던 그였기에 명나라의 고압적인 요구에 반발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바로 홍건적 두목인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나라가 아닌가? 이후 명나라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통일 왕조가 되지만 당시에는 신흥국에 불과했으니까 최영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최영이 볼 때 근본도 없는 홍건적 두목이 세운 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낸 것만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고려에 압력까지 가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실제로 주원장은 중국 역대 제국의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한미한 신분의 인물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도 최소한 하급 무장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가 내세운 대응책은 놀랍게도 한반도 북부를 확실히 영토화하는 것을 넘어 내친 김에 아예 랴오둥까지 정벌하자는, 과감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인 그 자신이 직접 원정에 나설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적임자로 다름아닌 이성계를 낙점한다. 최영 자신은 최고 사령관인 8도도통사를 맡아 우왕과 함께 서경에 머물면서 원정을 총지휘하기로 하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 ?~1390)를 좌군도통사로 임명한 것이다.

 

 

신이 된 장군 왜구 토벌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이성계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탓으로 최영은 후대에까지 숱한 설화와 무속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은 무속에서 신으로 추앙하는 최영장군신의 모습이다. 최영이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아마 이성계의 쿠데타가 민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졸지에 해결사로 나서게 된 이성계는 고민한다. 마음으로야 그도 자신의 고향인 화령(영흥)이 있는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랴오둥을 정벌하라는 최영의 강경책은 지나치다 못해 황당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그 전략이 무모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약소국이 상대국을 치는 격이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농번기에다 장마철인 여름에 군대를 움직이면 농사를 망칠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러나 최영의 의지는 단호했다(아마 최영은 무리한 랴오둥 정벌을 계기로 라이벌 이성계를 제거할 의도를 품었을 테고 이성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반박했을 것이다). 일단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진 길에 올랐으나 이성계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13885월 압록강 하류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실은 전 병력을 합쳐도 5만에 불과한 데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이미 도망병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때마침 큰 비가 내리고 있으니 더 이상 진군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런데도 서경에 있는 최영과 우왕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독촉과 채근만 거듭할 뿐이다. 그를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최영의 속셈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연 최영은 랴오둥 정벌에 뜻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적의 제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걸까?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결정한다. 이것이 조선 건국의 발단이 된 위화도 회군이다. 물론 당시까지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결단이겠으나 최영이 보기에는 당연히 반란이다. 랴오둥 정벌군이 말머리를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내려가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사기가 떨어져 진군할 수 없다던 이성계의 보고는 아마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갈 때는 느렸어도 돌아오는 속도는 무척 빨랐으니까. 순식간에 개경에 도착한 반란군은 최영의 수비군을 손쉽게 무찌르고 개경을 장악한다. 반란군이 정부군으로 바뀌자 이성계가 맨먼저 한 일은 최영을 유배시킨 것이었다최영은 자신의 고향인 고봉(지금의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합포로 옮겨져 목숨은 건지는 듯했으나 곧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비록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대세관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청렴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그는 오늘날 이성계보다 인기있는 위인이 되었다(이성계도 조선을 세운 뒤 1396년에 그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기렸다). 지금도 매년 단오날에는 부산의 사당에서 최영 장군제가 열리며, 무속인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기도 한다. 고양에 있는 그의 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린다는데, 그 이유는 청렴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품은 한 때문일까?.

 

다음 수순으로 그는 우왕을 폐위시켰는데, 후사에 관해서는 조민수와 의견이 엇갈렸다. 이성계는 다른 왕족 중에서 발탁하려 했으나 조민수와 이색(李穡)은 우왕의 아들을 주장한 것이다. 어차피 왕권이 유명무실해진 마당에 왕위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일까? 결국 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창왕(昌王, 재위 1388~89)이다.

 

 

역사를 결정한 섬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의 작은 섬인데, 현재 북한의 영토다. 강을 마저 건너면 랴오둥이고 말머리를 돌려 강을 되건너면 조선이었으니 이성계가 고민하기에는 적절한 장소다. 섬의 면적으로 보면 아마 이성계와 조민수는 전군을 강 뒤편에 둔 채 수뇌부만 이 섬으로 와서 대책을 숙의했을 것이다. 위 지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이 위화도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 위화도의 모습이다.

 

 

개혁이냐, 건국이냐

 

 

이색(李穡)이 창왕의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이 사대부와 손을 맞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은 최영과 운명을 함께 했고(여기에는 원나라가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점도 배경이 되었다), 사대부 세력은 즉각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접근해서 신군부와 인연을 맺으려 들었다. 그동안 물리력에 취약점이 있어 권력에 다가가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이제 한풀이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대부는 동질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권문세족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들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었으므로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이해관계로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저마다 색깔을 드러낼 것은 당연하다. 개혁이라는 대의에서는 모두가 같은 색이지만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관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대부는 점차 온건파와 급진파의 두 가지 그룹으로 묶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창왕의 옹립을 두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다.

 

조민수와 이색(李穡)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데서 보듯이 아직까지 주도적인 세력은 온건파다. 존경받는 학자이자 관료였던 이색과, 그에게서 당대 최고의 주자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정몽주(鄭夢周)가 리더다. 지만 급진파에는 미완의 대기(大器)가 브레인으로 속해 있다. 그는 바로 정도전(鄭道傳)이다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나이는 같았어도 직급에서는 엘리트 코스를 걸은 정몽주에 비해 한참 아래였다. 두 사람은 1384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동행한 적이 있는데, 정도전은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 문서담당자)이었다. 당시는 명과 고려의 관계가 최악이었고 그 전에 보낸 사신조차 명 황실에서 투옥해 버리는 바람에 누구도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과감히 사신을 자임해서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는데, 여기에는 명 황실에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한 정도전(鄭道傳)의 탁월한 문장력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당시 명 태조는 정도전의 표문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찰떡궁합이었던 두 사람은 곧 다른 배를 타게 된다. 주자학자답게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던 정몽주(鄭夢周)에 비해 정도전은 현실적인 대세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성향이 달랐던 탓이었을 게다.

 

유배 생활의 끝 무렵인 1383년에 그는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의 막사로 찾아가 세상사를 논한 적이 있는데, 그 만남은 정도전이 일찍부터 이성계를 새 시대의 리더로 점찍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두 살 터울의 두 사람은 아마 고려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성토하면서 쉽게 친해졌을 텐데, 혹시 그 자리에서 장차 있을 쿠데타를 구상하지 않았을까? 그때 그들은 서로 브레인과 물리력으로 역할 분담할 것을 결의한 것은 아닐까?

 

쿠데타 성공 이후 더욱 사이가 돈독해진 정도전(鄭道傳)과 이성계에게 조준(趙浚, 1346~1405)이라는 또 하나의 인물이 찾아온다. 그는 문신이었으나 왜구 토벌로 제법 이름이 알려졌을 뿐 아니라 쿠데타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우왕의 폐위를 도모할 만큼 대담하고 급진적인 성향이었으니 이성계의 진영이 여러 모로 마음에 맞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급진파의 삼총사가 탄생했다.

 

조준의 영입은 예상외의 성과를 가져왔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려 사회의 모순이 토지제도에 있다고 본 그는 개인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전제개혁안으로 만들어 제출했다. 그의 개혁안은 관리가 사망하고 나서도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는 수조권(收租權) 제도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 것이었으니, 내용으로 보면 옳긴 해도 그다지 참신한 점은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제안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무신정권과 권문세족의 오랜 지배가 끝나고 나자 이제 전국의 토지는 거의 다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새 관리는커녕 기존의 관리에게조차도 줄 봉급이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래서 공민왕(恭愍王)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에 열을 올린 것이지만, 이제는 기득권층이 불법으로 소유한 토지를 교통정리하는 정도의 조치로는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다. 기존의 모든 토지 소유관계를 무효화하고 밑그림부터 새로 그려야만 토지제도와 국가 재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새 나라가 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무르익는다.

 

 

 

 

예상했던 대로 기득권층은 물론 신진사대부들조차도 조준의 전제 개혁안에는 반대 일색이다. 비양심적인 세력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으니 당연히 반대였으나 양심적인 세력도 개혁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급진파 삼총사가 보기에 그것은 개혁도 하기 전에 개혁피로증을 걱정하는 격이다.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 상소가 잇따르자 이성계는 준비해둔 칼을 끄집어낸다. 당시 시중은 이색(李穡)이었고 이성계는 부총리격인 수시중(守侍中)이었지만 권력과 물리력을 지니고 있으니 시중은커녕 국왕도 두렵지 않다. 그는 재빨리 반대 세력의 핵인 조민수를 탄핵해서 유배를 보낸 다음 창왕을 폐위시킨다. 이렇듯 준비된 수순이 일사불란하게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삼총사의 탁월한 팀워크 덕분이다.

 

이성계는 일단 왕위를 이을 왕족을 물색하는데, 어지간히도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모양이다. 무려 200년 전의 왕인 신종의 7대손을 찾아 내서 옹립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마흔다섯 살의 중늙은이로 즉위한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92)은 아마 자신이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국왕으로서 그의 업무는 이제 시중에 오른 이성계의 비위를 맞추고 개혁 삼총사의 제안을 인준하는 것뿐이다. 그 첫 업무가 하필 유배된 우왕과 창왕의 처형장에 사인을 한 것이라서 기분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로써 급진파는 원하던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었다. 남은 과제(과제라기보다 절차라고 해야겠지만)는 단 두 가지, 하나는 온건파의 제거이고 다른 하나는 새 왕조의 건국이다. 친명이라는 대외 노선과 개혁이라는 대내 정책에서 목표가 같았던 두 파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급진파는 이미 개혁의 범위를 넘어섰다. 개혁 삼총사는 건국 삼총사로 바뀌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을 오히려 제거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때마침 그 과제를 달성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최영의 조카인 김저(金佇, ?~1389)가 유배 생활을 하던 우왕을 비밀리에 만나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곽충보(郭忠輔, ?~1403)라는 자가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김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이성계의 심복이었던 곽충보는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이 되었으니, 사람의 목숨이 한 끝 차이로 갈라지는 난세였다). 없던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호박이 굴러든 격이다. 삼총사는 우왕의 장인이자 전제개혁안을 반대하는 대표자인 이림(李琳, ?~1391)에게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투옥해 버린다.

 

 

 

 

건국의 또 다른 계기는 명나라에서 온다. 명나라에 파견되어 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무신들이 13905월 명 황실에 야릇한 보고를 올린 것이다. 내용인즉슨 공양왕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며 이성계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침공할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닌 허위보고였지만 가뜩이나 신군부 정권을 바라보는 명나라의 눈길이 곱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삼총사가 그대로 덮어둘 리 없다. 개경에서는 곧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져 온건파의 태두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이숭인(李崇仁, 1349~92), 변안렬(邊安烈, ?~1390), 우현보(禹玄寶, 1333~1400) 등이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더라면 조선 건국은 아마 실제보다 2년 앞선 1390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 보고를 무고로 결론짓고 윤이와 이초를 유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짓자 사태는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숙청된 인물들이 다시 복직되고 숙청을 주도한 정도전이 오히려 유배된 것이다.

 

급진파로서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최대의 위기, 그러나 위기는 곧 찬스다. 코너에 몰린 이성계는 아직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장악하는 것만 이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먼저 해둘 조치가 있다. 그것은 이미 재가가 난 조준의 전제개혁안을 하루빨리 시행하는 일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포함된 온건파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한 것은 과연 새 왕조를 개창할 만한 리더로서의 냉정침착한 태도다. 그것이 1391년의 과전법(科田法)인데,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만 온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온건파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은 치명타였다(과전법은 고려 말에 제정되었으나 조선의 토지제도로 기능하므로 하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왕권을 장악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마지막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수시중인 정몽주였다고려 말 왕들과의 관련성에서 볼 때도 정몽주(鄭夢周)가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공민왕(恭愍王)이 살해된 뒤 우왕은 권문세족의 대표인 이인임(李仁任)이 옹립했고, 다음 창왕은 신진사대부의 온건파 대표인 이색이 옹립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공양왕의 옹립에 찬성했다. 이는 고려의 중앙권력이 구 세력에서 새 세력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왕 때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고 공양왕 때 이색(李穡)이 몰락했으니 정몽주(鄭夢周)는 그 다음이 자기 차례 라는 것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온건파 최후의 보루로 남은 정몽주는 신군부가 왕위마저 찬탈하려는 기색을 감지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미 공공연하게 왕조 교체가 운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한사코 왕조는 그대로 두고 개혁으로써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자세로 일관한다. 그래서 1391년에 이성계의 브레인인 정도전(鄭道傳)과 심복인 남은(南誾, 1354~98)을 유배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마 그도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한때 개혁의 동지였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는 사건이 생기자 정몽주는 그가 개경을 비운 지금이 건국 삼총사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라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성계에게는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비록 다섯째 아들이긴 하지만 아버지처럼 장차 왕위를 꿈꾸는 스물다섯 살의 야심찬 젊은이 이방원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이성계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보람은 아주 컸다. 문병을 핑계로 정세를 엿보러 왔던 정몽주가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趙英珪, ?~1395)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된 것이다. 그간 많은 피를 손에 묻혀왔던 이성계라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섰더라면 아마 오랫동안 우의를 다져온 정몽주(鄭夢周)를 그렇듯 처참하게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어쨌든 이제 새 왕조 건국의 도정에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다. 13927월 드디어 이성계는 공양왕을 퇴출시키고 군신들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비록 그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고 굳이 왕조 교체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나(조선이라는 국호가 채택되는 것은 그 이듬해다), 고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왕실의 성이 바뀌었으니 누구도 곧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을 의심치 않았다.

 

 

충신의 피 마지막까지 고려를 구하기 위해 애쓴 정몽주(鄭夢周)는 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미 고려 왕실은 사망선고를 받았으므로 설사 정몽주가 죽지 않았다 해도 고려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신군부에 용감히 맞선 그의 저항은 1979년 쿠데타 세력에게 순순히 정권을 내주고 이후에도 침묵하다가 끝내 비밀을 안고 죽은 어느 대통령을 부끄럽게 만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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