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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공민왕, 전민변정도감, 신돈, 신진사대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공민왕, 전민변정도감, 신돈, 신진사대부)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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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권문세족의 태생적 결함은 결국 현실로 드러났다. 원나라와 운명공동체로 출발한 그들이었으니 몰락도 원나라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원나라가 급작스럽게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세조 이래 원 황실은 한화 정책에 열심이었으나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고 유목문명이 농경문명을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제위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권력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했던 세조 이후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10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웠던 원 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 사치를 일삼았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가지가 엎치고 덮치는 법이다. 제국의 상층부가 약화되는 것과 동시에 하부에서도 제국을 몰락시키는 주요 동력이 생겨난다. 한족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비록 한화 정책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몽골의 한족 지배는 몽골 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기간의 민족 차별에 불만이 커진 한족은 원나라의 통치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각지에서 봉기하기 시작한다. 선두주자는 남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 금세 반원(反元) 항쟁의 핵심으로 성장한 홍건적의 우두머리인 주원장(朱元璋, 1328~98)은 먼저 난징을 함락하여 강남을 장악한 뒤 북벌을 감행한다. 마침내 1368년에 대도가 함락되면서 원나라는 100여 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고향인 몽골 초원으로 달아났다.

 

원 황실의 명으로 어린 조카 충정왕을 대신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恭愍王)은 아마 어린 시절 대도에 머물 때부터 원나라가 쇠퇴하는 기미를 알아차렸던 듯하다. 즉위 이듬해에 곧바로 몽골 복식과 변발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건 곧이어 전개될 개혁 드라이브의 방아쇠였다. 아직 멸망하지 않은 원나라를 타깃으로 삼을 수는 없으니 개혁의 대상은 당연히 국내의 친원파 기득권층, 즉 권문세족이다. 공민왕은 정방(政房)을 대폭 개편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기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그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혁신 조치를 실행한다(전민변정도감은 1269년 원종 때 처음 설치된 이래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임시로 설치되곤 했는데, 공민왕 때는 세 차례나 설치되었다). 그러나 손놓고 기득권을 빼앗긴다면 기득권층이라는 이름을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원나라의 쇠퇴가 국내 친원파에게까지 피부로 느껴지는 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권세가들은 공민왕의 개혁에 거세게 반발했고 심지어 반란까지 꾀하기에 이른다.

 

 

그 기세에 공민왕(恭愍王)은 잠시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1356년에는 2차 개혁에 나섰다. 원 황실과 혼맥을 구축하고 세도를 부리던 골수 친원파 기철(奇轍, ?~1356)이 반란을 꾀한 것은 오히려 공민왕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기씨 집안을 처단한 것을 기화로 공민왕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최종적으로 폐지하고, 100년간이나 존속하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제거하는 한편, 원나라식 관제를 고려의 옛 관제로 되돌리고 원나라의 연호마저 폐지함으로써 개혁의 성격이 반원에 있음을 천명한다(첨의부도 다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권세가들의 저항도 저항이려니와 개혁의 주도 세력이 왕실 외척인 탓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략해 오는 바람에 개혁의 환경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략이 다소 가라앉은 뒤 곧바로 3차 개혁을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신분상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개혁 주체를 기용한다. 그는 바로 노비를 어머니로 둔 신돈(辛旽, ?~1371)이라는 승려였다.

 

기철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측근 무신 김원명(金元命, ?~1370)의 추천으로 신돈을 알게 된 공민왕은 마침내 개혁의 리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밝힌 신돈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니 큰일을 맡길 만하다.’ 바꿔 말하면 노비 출신의 승려라는 신돈(辛旽)의 보잘것없는 신분을 오히려 후하게 평가한 셈인데, 신분이라는 요소로써 중용을 결정할 만큼 당시 공민왕(恭愍王)의 처지가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하기는, 권문세족들이 득시글거리는 데다 홍건적의 침략으로 신흥 무장 세력마저 발흥하고 있는 고려의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하려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신돈 같은 신분밖에 없었을 것이다1365년 공민왕(恭愍王)은 사랑하던 아내인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져 신돈에게 개혁을 맡겼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이미 두 차례의 개혁에서 공민왕의 성향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신임은 대단히 두터웠던 모양이다. 신돈(辛旽)은 중국에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이라 불리면서 행차할 때는 국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으로 불교계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당대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보우(普愚, 1301~82)는 그를 요사스런 승려라고 혹평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신돈은 공민왕이 말한 것처럼 친당이 없는 독자적인 인물이었던 듯하다.

 

과연 1365년 신돈은 임용되자마자 인사권을 장악하고 권력의 기반을 다진 다음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는데, 타깃은 단연 권문세족이다. 우선 권문세족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국정의 모든 결정권을 궁궐 안으로 가져온다. 이것으로 권세가들은 일단 정치적 영향력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다음 개혁 조치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1차 개혁에서도 시도된 조치였지만 이번에는 신돈 자신이 판사로 참여해서 직접 토지 심사를 맡았으니 그 강도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찬탈한 토지는 속속 농민들에게 반환되었으며, 그 덕분에 신돈(辛旽)은 백성들에게서 성인이 나타났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난세의 문화군주 몽골이 패망할 조짐을 알아챈 공민왕(恭愍王)은 즉각 고려사회의 대대적인 수술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공민왕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갖춘 데다 천산대렵도라는 작품까지 그렸을 만큼 문화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군주가 암살된 것은 늘 개혁이 좌절되고 인물이 제거되는 우리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를 말해준다.

 

 

그러나 단지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게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개혁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사회의 새로운 주도층을 만들어내야 한다. 신돈(辛旽)이 낙점한 그 신진 세력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1367년 그는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짓고(성균관은 충렬왕(忠烈王) 때 처음 설치되었으나 당시에는 기존의 학교들을 모아 성균관이라 이름지은 정도였다) 공자천하의 스승이라 칭하면서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한다. 그들이 바로 신흥 학문인 주자학을 숭상하는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이다(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신진사류新進士類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조선과의 연관성을 기해 사대부로 통일하기로 하자).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을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독자적 세력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그가 개혁의 리더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니 신돈의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장점은 오히려 그의 몰락과 개혁의 실패를 부르게 된다. 우선 권문세족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신돈의 개혁 드라이브가 급진적으로 흐르자 권세가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를 천거했던 김원명까지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래도 새로운 개혁 세력이 튼튼했다면 아마 그들의 반동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을 전공한 신진 사대부들이 승려인 그를 100퍼센트 충심으로 대했을 리는 없다. 1367년 신돈(辛旽)이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까지 낳자 오히려 그들은 신돈의 사생활을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나선다.

 

원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참신한 독자 노선이 무기였던 신돈은 급속히 방향 감각을 잃었다. 권문세족의 집요한 저항에 대해 그는 서경 천도를 계획한다거나 충숙왕 때 이미 폐지된 사심관(事審官)을 부활시켜 맞불을 놓으려 했으나 그것은 개혁을 주창한 그가 먼저 복고를 부르짖는 격이다. 결국 그 대응책들이 실패하면서 신돈은 최대의 지지자인 공민왕(恭愍王)의 신임마저 잃고 만다. 1371년 그는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그것으로 공민왕의 개혁, 아울러 고려 최후의 몸부림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이제 고려는 몰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수구와 진보

구국의 쿠데타?

개혁이냐, 건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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