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건국
태종은 정식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형인 정종의 세제(世弟)로 책봉된 다음부터 곧바로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담당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두 번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개국초기증후군이라 해도 고려의 경우보다 왕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선 조선의 경우는 좀 심했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격화된 이유는 왕자들이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저마다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한 것은 그런 노력이다(기구상으로는 정도전이 만든 의흥삼군부와 건국 초에 군사 문제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중추원(中樞院)이 합쳐져서 삼군부를 이루었다. ‘삼군’이란 좌군, 우군에다 국왕의 친위대를 합친 개념이다).
물론 의정부를 만들었지만 사대부들의 권력기관인 의정부에 많은 권력과 권한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태종은 국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承政院)을 직속기구로 독립시켜 의정부가 하던 기능을 대부분 직접 관장하였으며, 정책 토론기구로서 사간원(司諫院)을 신설해 의정부의 기능을 분산시켰고, 아울러 사헌부(司憲府)의 기능도 강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행정부(의정부), 입법부(사간원), 사법부(사헌부)의 골격을 갖춘 셈이지만, 당시는 왕국인 만큼 그 ‘3권(三權)’이 모두 국왕의 직속기관이었다. 특히 의정부의 정승들이 가지고 있던 문무 관리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에 각각 귀속시킨 것은 태종이 사대부들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얼마나 부심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 육조(六曹)는 의정부에 비해서 아무래도 왕권의 직접적인 관할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왕권 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비정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했던 처남 민무구(閔無咎) 4형제를 죽인 것이나 심복인 이숙번(李叔蕃)을 유배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모조리 씨가 마르게 된다. 이제 사대부들은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士林)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도전(鄭道傳)이 애써 가꾸었던 사대부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중앙관제를 정비했으면 그 다음 과제는 지방행정제도의 수술이다. 고려시대의 유물인 향ㆍ소ㆍ부곡을 해체하고, 주요 도시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고, 전 지역을 목(牧)과 군(郡)과 현(縣)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아울러 전국의 도를 여덟 개로 구분하고 이름을 개정하니, 이른바 조선 8도라는 말의 기원은 바로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 모든 개혁 조치, 2차 건국사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분명한 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와 행정 개혁만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또 뭐가 필요할까? 바로 재정이다. 국가 재정이 튼실하지 못하면 왕국은커녕 사대부 국가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도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자신이 조선 왕계의 새로운 적통으로 자리 잡으려면 안정된 재정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동안 다져놓은 권력을 기반으로 그는 드디어 최종 마무리 작업인 경제 개혁에 들어간다.
국가 재정의 기초는 단연 토지이므로 우선 필요한 것은 양전(量田), 즉 토지 측량이다.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어디 다 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양전은 이미 고려 말 창왕 때부터 시작된 사업이었으나, 태종은 거기에 더욱 채찍질을 가해 1413년에 마침내 그 결실을 거둔다. 남쪽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북쪽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대대적인 측량 사업을 전개한 결과 120만 결의 토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임자 없는 땅을 거둬들였다면 그 다음 절차는 부당한 임자가 가진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고려시대 최대의 성황을 누렸던 불교 사원들의 토지다. 면세의 혜택에다 고려 중기부터 대지주들과 함께 토지 겸병으로 엄청난 토지를 장악했던 사원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정도전(鄭道傳)의 이념적 포화를 받은 데다 태종의 경제적 공략으로 사원들은 사실상 기능 마비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유명 사찰들이 거의 대부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당시 도시와 촌락에 있던 시원들이 깨끗이 청소되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둬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하며, 그게 곧 국가의 운영이다. 지금처럼 사회간접시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다. 고려시대에도 바로 그 문제가 토지제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태종은 고려 말 전시과(田柴科)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과전법(科田法)을 손보기 시작한다. 마침 상당량의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공전(公田)을 잔뜩 늘려놓은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과전법을 개혁할 수 있는 조건이 숙성되었다【농경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식 왕조에서는 원래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 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까지 미칠 때 다시 새 왕조로 대체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 역시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그러나 여기서 개혁의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중시되는 내용, 즉 관리들의 등급에 따라 토지(봉급)가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토지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 따위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것은 과전법(科田法)의 구체적 시행보다도 그 바탕에 깔린 정신과 기본 성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요소들이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려의 토지제도는 중대까지 전시과(田柴科)가 적용되었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만을 허용하는 제도다. 원리상으로는 훌륭한 제도이므로 그대로만 집행된다면 아무 문제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았던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진 바 있었다.
불행하게도 전시과(田柴科)를 대체한 조선의 과전법(科田法)도 전시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작은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전시과는 지방 호족들의 권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토지를 배분하는 데 인품이라는 모호한 기준까지 적용되었지만 중앙집권력이 한층 강화된 조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전법을 제정한 동기와 시행한 과정은 전시과의 경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은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收租權)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아울러 전시과를 제정할 때보다 시지柴地의 중요성이 덜해졌으므로 명칭도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과전법(科田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전시과에서나 과전법에서나 모두 세습을 인정했던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收租權)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해서 자손 대대로 상속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특권은 나중에 공신의 후손 세력과 신흥 사대부 세력 간에 알력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아마 태종은 양전사업의 결과로 당장 손에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쥐어져 있으므로 굳이 그런 결함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초에도 그랬듯이 원래 개국 초기에는 관리들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충분한 데다가 양전 사업과 사전 혁파를 통해 국가 재정을 크게 늘린 그였으니 그런 걱정일랑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전법(科田法)의 문제점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터져 나온다.
그토록 재정 확보에 신경을 집중하고 여러 차례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해서 재정을 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돈 쓸 곳은 너무나 많다. 더구나 그는 사실상의 건국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니 재정은 항상 부족하기만 하다. 결국 새로 임용하는 관리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현상은 고려 초기보다 훨씬 앞당겨지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태종은 원래 경기 지역에만 설정했던 과전을 충청ㆍ경상ㆍ전라의 하삼도(下三道) 지역까지 확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면 한양으로 오는 양곡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다음 왕 세종은 다시 과전을 경기 지역으로 제한한다. 당대에는 어느 누구도 몰랐겠지만 이렇게 개국 초부터 토지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태종의 왕국 실험이 장차 실패로 끝날 것임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 왕조 교체 = 지주 교체 고려와 조선의 닮은꼴은 무엇보다 토지제도에서 나타난다. 태종 때 전면적으로 실시한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은 고려 초의 전시과(田柴科)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과전법은 기존의 토지 소유관계를 그대로 두고 임자만 새 왕조의 건국 세력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결국 왕조 교체의 필연성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그림은 『고려사』에 기재된 과전법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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