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 목표였겠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두뇌이며,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어도 정도전은 인테리어까지 마쳐야만 완공이라고 본다. 게다가 중국의 까다로운 준공 검사에 합격하려면 인테리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가 아직도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에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다.
컴백한 유교제국 명나라와 좋은 짝을 이루려면 조선도 유교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조선경국전』으로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갓 자리잡은 유학을 확고히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최대 무기인 붓을 놓지 않는다. 1394년에는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써서 유교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불교와 도교를 공격하는가 하면, 4년 뒤에는 『불씨잡변(佛氏雜辨)』으로 불교에 대해 확실한 사형선고를 내린다【‘심기리’의 심(心)은 불교, 기(氣)는 도교, 리(理)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하여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 사상을 이용하여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鄭道傳)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라고 한다(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이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붓이 칼보다 강한 경우는 사회가 정상적인 진화 과정을 밟고 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조선은 인테리어가 끝나지 않은 미완성 건물, 따라서 아직까지는 붓보다 칼의 힘이 더 강했다.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도 보았듯이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초기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카리스마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카리스마가 특정한 개인에게 매끄럽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성계에게는 1354년생인 맏이에서부터 1382년생인 막내까지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는 데다 그 가운데 첫째 아내에게서 얻은 여섯 아들은 조선을 건국할 무렵 모두 장성해 있었다.
건국 당시 이미 이성계의 나이는 오십대 후반이었으니 아무래도 후계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장자 계승의 전통적인 원칙이 있지만 그것 역시 사회가 정상적인 행정에 있을 때나 통하는 원칙일 따름이다. 더구나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李芳雨, 1354~93)는 고려 말부터 관직을 맡아 일했으나 아버지의 역성 쿠데타에 반발하고 은퇴해서 황해도 해주로 가 술을 벗하며 살다 죽어 가뜩이나 복잡한 후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그래서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초기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온다. 조선 왕조를 배경으로 한 통속 역사소설과 TV 사극에서 즐겨 다루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시 1392년 건국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갓 탄생한 새 왕조가 한시바삐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의 승계가 분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장성한 여섯 아들이 모두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들이었으므로 이성계는 어느 아들을 특별히 편들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방책을 마련한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이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왕위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는가, 아닌가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무척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아버지가 건국자인 경우 아들은 대개 그런 신분이 아니다. 따라서 개국공신들, 쉽게 말해 건국자의 부하들은 건국자의 아들에 대해 특별히 왕자로서의 예우를 갖춰 대하지는 않았다(물론 건국자의 아내, 즉 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아마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정도전(鄭道傳)이나 조준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李芳蕃, 1381~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는다(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아마 이성계는 처가로부터 받은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을 겸 해서 방번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것이다).
물론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1354~98)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일단 찬성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여섯 아들이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는 정도전은 권력의 경쟁자인 그들이 왕권마저 장악하면 자칫 국가 대사는 물론 그 자신의 개인적 야망마저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음직하다. 하지만 공신들은 이성계에게, 그럴 바에는 오히려 막내인 이방석(李芳碩, 1382~98)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한다. 기록에는 방번이 경솔한 성품이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겨우 열한두 살짜리 아이가 경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공신들은 필경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1392년 8월에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방석의 배다른 형들, 즉 신의왕후의 여섯 아들은 입이 잔뜩 부을 수밖에 없다. 막상 조선 건국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뛴 것은 자기들인데, 엉뚱하게도 열한 살짜리 배다른 막내동생이 세자가 되었으니 죽 쒀서 개 준 격이란 바로 그들의 처지를 뜻하는 말이리라. 특히나 정몽주(鄭夢周)를 죽여 사실상 건국의 길을 닦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1418)은 기가 막힌 심정이다. 정몽주에 이어 또 하나의 정씨(정도전)가 그의 타깃이 되는 계기는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노래 짓고 천도하고 책 쓰고 군사 조련하면서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해온 그였으니 알았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직하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진법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8월 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당시 정도전(鄭道傳)은 이웃집으로 도망쳤다가 주인의 밀고로 잡혀나와 이방원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예전에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주시오.” 그가 말하는 ‘예전’이란 바로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덕분에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왔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또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 길로 이성계에게 달려간 여섯 왕자는 아버지에게 세자를 다시 책봉하라고 다그친다. 브레인을 잃은 이성계는 독자적인 판단을 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형제들은 모두 방원을 추대했으나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형인 이방과(李芳果, 1357~1419)에게 양보했다(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가뜩이나 ‘두뇌’를 잃고 헤매던 이성계는 두 아들이 여섯 아들에게 왕따를 당해 살해되자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할 기력이 없다. 그래서 다음 달인 9월에 새 세자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곧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이다. 그러나 이것은 1라운드에 불과했다(무인戊寅년에 일어났다 해서 이 사건을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간지干支로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조선시대 내내 흔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도 그랬듯 아직 개국초기증후군이 끝나려면 2라운드가 필요했다.
▲ 가지 많은 나무 이성계 집안의 가계도다. 옛날로 치면 여덟 아들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건국자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적을수록 분란의 불씨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당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서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했던 정도전(鄭道傳)이다.
유교왕국의 모순
조선의 2대왕 정종은 고려의 2대왕인 혜종과 같은 처지다. 서열상 맏이인 덕택에 왕위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안다. 더구나 그에게는 후사도 없다(아들은 있었지만 정비正妃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방번, 방석 형제까지 서자로 취급된 판에 왕위계승권을 바랄 수는 없다). 그래도 시한부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해보기 위해 그는 즉위한 직후 개경으로 천도해서 한양의 악몽을 떨쳐내려 하지만 그가 물러나야 하는 상황은 예상보다 일찍 닥친다. 2라운드의 시작이다.
서열에 따르자면 다음 왕위계승권은 셋째인 이방의(李芳毅, ?~1404)에게 있으나 그는 일찌감치 왕위를 포기하고 다섯째인 방원을 밀고 있다. 그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지만 두번째 분쟁은 바로 여기서 싹튼다. 당연히 넷째 이방간(李芳幹, ?~1421)은 둘째(정종)와 셋째(방의) 형들이 아우인 방원을 지원하는 게 불만이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목표(왕위)가 있고 수단(군대)이 있고 열정(방원에 대한 시기심)도 있으니 반란의 삼박자가 구비된 셈이다.
아우의 의도를 알게 된 정종이 만류하지만, 방간은 마침내 1399년에 병력을 일으켜 방원에게 도전한다.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가 그랬듯이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두 아우의 대결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다. 개경 시내 한복판에서 두 형제가 사력을 다해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결과 승자는 방원으로 정해졌다.
결승전에서 승리했다는 여유일까? 아니면 더 이상 형제의 목숨을 빼앗는 데 부담을 느낀 걸까? 아무튼 방원은 형 방간의 목숨만 살려주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죽여 버렸다. 이제 대권후보가 단일화되었으니 정종이 갈 길도 결정된 셈이다. 정종은 이듬해 2월 ‘무서운 아우’ 방원을 세자가 아닌 세제(世弟)로 삼고 그 해 말에 왕위를 양보한다. 친형제의 대결로 벌어진 2라운드는 결국 애초부터 집요하게 왕권을 노린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혈투 끝에 왕위에 오른 방원, 즉 태종(太宗, 재위 1400~18)은 고려의 4대왕인 광종(光宗)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건국자의 아들로서 치열한 왕위계승전의 최종 승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정상적인 재위 기간을 회복한 것도 그렇다. 또 이후 왕실의 적통이 그에게서 비롯된다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크게 닮은 점은 제2차 건국사업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고려의 광종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하고 관제를 개편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설정했듯이 조선의 태종도 그간 권력 승계의 문제 때문에 미뤄졌던 여러 가지 건국사업을 마무리한다【권력다툼의 측면만 보면 조선의 태종과 비슷한 인물은 고려의 광종(光宗)보다는 800년 전 중국 당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이다. 당의 건국자였던 이연(李淵)은 조선의 이성계처럼 살아 생전에 두 아들이 한 아들에게 죽는 비극을 겪고 제위마저 내준다. 그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은 황태자였던 형 이건성과 아우인 이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태종으로 즉위했다. 당의 황실과 조선의 왕실 성씨가 모두 이씨였던 점도 흥미로운 일치이며, 이세민과 이방원은 공교롭게도 ‘태종’ 이라는 묘호마저 같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끝에 즉위한 것과는 반대로 당 태종 이세민과 조선 태종 이방원은 재위 시절 뛰어난 치적을 보였는데, 정치에 관한 한 수단과 목적은 별개인 모양이다】.
조선 왕조 전체로 볼 때 이방원이 대권을 승계한 것은 단순한 파워 게임만이 아니다. 마치 무협영화처럼 전개된 그 사건의 이면에는 중대한 의미가 숨어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조선 왕조가 당당한 ‘왕국’ 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왕국이라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게 중요할까? 물론 형식상으로 보면 조선은 왕국으로 출발했고 20세기 초에 멸망할 때까지 내내 왕국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다르다. 조선은 이성계가 왕국으로서 세운 나라지만,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 즉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사실상 새 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서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바로 여기에 유교왕국의 모순이 놓여 있다.
앞서 말했듯이 무릇 유교왕국이라면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실제의 정치와 행정은 사대부가 담당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여기에 가장 충실했던 것은 바로 이성계가 재위하던 시절의 조선이다.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이자 시공자로서, 또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의 기획자이자 설계자로서 서로 조화로운 분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형적인 ‘이원집정부제’가 언제까지나 제대로 기능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서열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국왕의 권위가 언제까지나 권력으로 바뀌지 않은 채 사대부들이 원하는 것처럼 상징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유교왕국은 늘 중앙권력의 불안정에 시달려온 게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의 역사를 참고해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처음으로 유학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던 중국의 한나라는 사대부들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황실의 외척과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했고, 당나라는 과거제(科擧制)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변방의 절도사들이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 뒤를 이은 송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대부들은 꿈에 그리던 권력을 잡았으나, 밖으로는 강성한 북방 이민족 왕조들에게 시달리고 안으로는 사대부들 간의 치열한 당쟁으로 국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한반도의 경우는 중국보다 시기적으로 한 왕조씩 뒤처진다. 즉 통일신라시대에 유학이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고(중국의 한 무제처럼 그것을 분명히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에 귀족과 호족들이 중앙정치를 주물렀으니, 이는 각각 중국의 한나라와 당나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의 송나라와 비교할 수 있겠는데, 이후에 보겠지만 과연 건국 초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사대부 왕국으로 탈바꿈되어 당쟁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1천 년이 넘는 그 기나긴 과정에서 중국식 제국이 가장 강성하고 가장 크게 번영했던 시기는 바로 강력한 황제가 재위하던 시절이었다. 한 무제, 당 태종, 송 태조가 제국을 다스리던 중앙집권의 시대가 바로 그런 시기들이다. 사대부들에게는 악몽 같은 시절이었겠지만.
송나라가 온몸으로 보여주었듯이 가장 완벽한 유교제국이 가장 부실한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유교국가의 근본적 모순이다. 정도전(鄭道傳)은 그 점을 미처 알지 못했기에 조선을 유교왕국으로 만드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알았지만, 실은 그의 실험이 실패한 게 신생국 조선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실력으로 왕좌를 차지한 태종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는 비로소 진짜 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도약과 번영의 시대를 맞는다.
▲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沈之伯 開國原從功臣錄券): 공신녹권은 왕조의 창업이나 국가적 중대사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발급된 공신증명서이다. 개국원종공신이란 개국 의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잠저 때부터 신변을 지켜주고 대업을 적극 권고한 공로가 있는 신하를 말한다.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원년(1392) 10월부터 6년(1397) 12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발급하였고, 그 중 하나가 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이다.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6년 10월 공신도감에서 전 조봉대부 사재부령 심지백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녹권에는 심지백을 포함하여 모두 75명의 원종공신의 이름이 쓰여 있고, 이들 각 공신에게 전 15결을 상으로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손에게는 음직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아 이 녹권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필사본인데 비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목활자인쇄본이라 인쇄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개국공신의 양면성 이성계가 어느 개국공신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한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다. 조선이 정상적인 왕국으로 출범했더라면 개국공신들은 자연스럽게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 세력을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이 그 행정을 비틀어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대부가 실권을 쥐는 체제를 만들려 했기에 왕자의 난이라는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2차 건국
태종은 정식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형인 정종의 세제(世弟)로 책봉된 다음부터 곧바로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담당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두 번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개국초기증후군이라 해도 고려의 경우보다 왕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선 조선의 경우는 좀 심했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격화된 이유는 왕자들이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저마다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한 것은 그런 노력이다(기구상으로는 정도전이 만든 의흥삼군부와 건국 초에 군사 문제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중추원(中樞院)이 합쳐져서 삼군부를 이루었다. ‘삼군’이란 좌군, 우군에다 국왕의 친위대를 합친 개념이다).
물론 의정부를 만들었지만 사대부들의 권력기관인 의정부에 많은 권력과 권한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태종은 국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承政院)을 직속기구로 독립시켜 의정부가 하던 기능을 대부분 직접 관장하였으며, 정책 토론기구로서 사간원(司諫院)을 신설해 의정부의 기능을 분산시켰고, 아울러 사헌부(司憲府)의 기능도 강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행정부(의정부), 입법부(사간원), 사법부(사헌부)의 골격을 갖춘 셈이지만, 당시는 왕국인 만큼 그 ‘3권(三權)’이 모두 국왕의 직속기관이었다. 특히 의정부의 정승들이 가지고 있던 문무 관리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에 각각 귀속시킨 것은 태종이 사대부들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얼마나 부심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 육조(六曹)는 의정부에 비해서 아무래도 왕권의 직접적인 관할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왕권 강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비정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했던 처남 민무구(閔無咎) 4형제를 죽인 것이나 심복인 이숙번(李叔蕃)을 유배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모조리 씨가 마르게 된다. 이제 사대부들은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士林)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도전(鄭道傳)이 애써 가꾸었던 사대부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중앙관제를 정비했으면 그 다음 과제는 지방행정제도의 수술이다. 고려시대의 유물인 향ㆍ소ㆍ부곡을 해체하고, 주요 도시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고, 전 지역을 목(牧)과 군(郡)과 현(縣)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아울러 전국의 도를 여덟 개로 구분하고 이름을 개정하니, 이른바 조선 8도라는 말의 기원은 바로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 모든 개혁 조치, 2차 건국사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분명한 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와 행정 개혁만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또 뭐가 필요할까? 바로 재정이다. 국가 재정이 튼실하지 못하면 왕국은커녕 사대부 국가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도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자신이 조선 왕계의 새로운 적통으로 자리 잡으려면 안정된 재정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동안 다져놓은 권력을 기반으로 그는 드디어 최종 마무리 작업인 경제 개혁에 들어간다.
국가 재정의 기초는 단연 토지이므로 우선 필요한 것은 양전(量田), 즉 토지 측량이다.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어디 다 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양전은 이미 고려 말 창왕 때부터 시작된 사업이었으나, 태종은 거기에 더욱 채찍질을 가해 1413년에 마침내 그 결실을 거둔다. 남쪽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북쪽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대대적인 측량 사업을 전개한 결과 120만 결의 토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임자 없는 땅을 거둬들였다면 그 다음 절차는 부당한 임자가 가진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 대상은 뭐니뭐니해도 고려시대 최대의 성황을 누렸던 불교 사원들의 토지다. 면세의 혜택에다 고려 중기부터 대지주들과 함께 토지 겸병으로 엄청난 토지를 장악했던 사원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정도전(鄭道傳)의 이념적 포화를 받은 데다 태종의 경제적 공략으로 사원들은 사실상 기능 마비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유명 사찰들이 거의 대부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당시 도시와 촌락에 있던 시원들이 깨끗이 청소되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둬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하며, 그게 곧 국가의 운영이다. 지금처럼 사회간접시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그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다. 고려시대에도 바로 그 문제가 토지제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태종은 고려 말 전시과(田柴科)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과전법(科田法)을 손보기 시작한다. 마침 상당량의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공전(公田)을 잔뜩 늘려놓은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과전법을 개혁할 수 있는 조건이 숙성되었다【농경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식 왕조에서는 원래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패턴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 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까지 미칠 때 다시 새 왕조로 대체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 역시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그러나 여기서 개혁의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중시되는 내용, 즉 관리들의 등급에 따라 토지(봉급)가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토지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 따위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것은 과전법(科田法)의 구체적 시행보다도 그 바탕에 깔린 정신과 기본 성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요소들이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려의 토지제도는 중대까지 전시과(田柴科)가 적용되었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만을 허용하는 제도다. 원리상으로는 훌륭한 제도이므로 그대로만 집행된다면 아무 문제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았던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진 바 있었다.
불행하게도 전시과(田柴科)를 대체한 조선의 과전법(科田法)도 전시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작은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전시과는 지방 호족들의 권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토지를 배분하는 데 인품이라는 모호한 기준까지 적용되었지만 중앙집권력이 한층 강화된 조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전법을 제정한 동기와 시행한 과정은 전시과의 경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은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收租權)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아울러 전시과를 제정할 때보다 시지柴地의 중요성이 덜해졌으므로 명칭도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과전법(科田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전시과에서나 과전법에서나 모두 세습을 인정했던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收租權)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해서 자손 대대로 상속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특권은 나중에 공신의 후손 세력과 신흥 사대부 세력 간에 알력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아마 태종은 양전사업의 결과로 당장 손에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쥐어져 있으므로 굳이 그런 결함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초에도 그랬듯이 원래 개국 초기에는 관리들에게 나누어줄 토지가 충분한 데다가 양전 사업과 사전 혁파를 통해 국가 재정을 크게 늘린 그였으니 그런 걱정일랑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전법(科田法)의 문제점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터져 나온다.
그토록 재정 확보에 신경을 집중하고 여러 차례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해서 재정을 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돈 쓸 곳은 너무나 많다. 더구나 그는 사실상의 건국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니 재정은 항상 부족하기만 하다. 결국 새로 임용하는 관리에게 봉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현상은 고려 초기보다 훨씬 앞당겨지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태종은 원래 경기 지역에만 설정했던 과전을 충청ㆍ경상ㆍ전라의 하삼도(下三道) 지역까지 확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면 한양으로 오는 양곡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다음 왕 세종은 다시 과전을 경기 지역으로 제한한다. 당대에는 어느 누구도 몰랐겠지만 이렇게 개국 초부터 토지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태종의 왕국 실험이 장차 실패로 끝날 것임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 왕조 교체 = 지주 교체 고려와 조선의 닮은꼴은 무엇보다 토지제도에서 나타난다. 태종 때 전면적으로 실시한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은 고려 초의 전시과(田柴科)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과전법은 기존의 토지 소유관계를 그대로 두고 임자만 새 왕조의 건국 세력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결국 왕조 교체의 필연성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그림은 『고려사』에 기재된 과전법의 내용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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