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기획자②
여러 문헌을 뒤적거리며 국호 후보감을 찾던 그는 아마 고려를 건국하던 무렵의 왕건이 부러웠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취지였으니 고려라는 국호는 지을 것도 없이 당연했을 테니까(고려가 그 취지와는 달리 신라를 계승한 왕조라는 점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게다가 왕건의 시대에는 중국이 분열기에 있어 간섭할 나라도 없지 않았던가? 그 반면에 지금은 새 나라의 국호조차 독자적으로 짓지 못하고 중국의 허가를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허가 여부가 국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고심 끝에 그는 결국 두 개의 후보를 찾아낸다.
하나는 ‘화령(和寧, 지금의 영흥)’이다.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니, 이것은 건국자의 출생지를 국호로 정하는 중국의 고대 전통을 따른 작명이다. 물론 하자는 없지만 아마 정도전은 중국 측이 그 이름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을 받드는 처지에 중국의 전통을 여과없이 취한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화령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곳, 그러니까 철령위(鐵嶺衛) 사태에서 쟁점이 된 지역이 아닌가? 화령이 어딘지를 명나라가 모를 리 없을 테니 아마 그런 지역의 이름을 국호로 쓴다면 중국에서 쓸데없이 그 저의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또 하나의 후보가 필요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 이다. 조선이라면 한반도 역사의 여명기에 있었던 고대 국가의 이름이니 굳이 명나라에서도 반대할 리 없다. 더욱이 당시의 조선(고조선)은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국가였을 뿐 아니라 2500년 전, 그러니까 중국에서 주나라가 세워질 무렵 무왕(武王)은 은나라 귀족 기자(箕子)에게 조선을 봉토로 내주지 않았던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정도전(鄭道傳)은 무왕을 주원장(朱元璋)에 비유하고, 기자를 이성계에 비유하는 절묘한 알레고리(allegory)를 생각해낸다. 홍건적 두목 출신인 주원장도 자기가 전설 속의 성군(聖君)인 무왕에 비교되면 더없이 만족할 테니, 국호 승인은 따놓은 당상이다【조선이라는 국호에 대단히 만족했던 정도전(鄭道傳)은 자신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그 경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해동(한반도)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박ㆍ석ㆍ김 세 성씨가 신라라고 일컬었고, 온조는 백제라 했으며, 견훤은 뒤에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며, 궁예는 후고구려라 했고, 왕씨(왕건)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임의로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 침략하였으니, 국호는 있으되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기자 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 왕에 봉해졌다.”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조선은 국호를 정할 때부터 사대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 왕조였다】.
1392년 자청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상질(韓尙質, ? ~ 1400)은 과연 이듬해 2월에 당당히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온다. 이 ‘작명 해프닝’은 한편으로 정도전의 천재적인 재치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새 왕조를 세웠음에도 그의 대중국관이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아직 국교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명나라는 국호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조선을 엿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심사가 꼬인 명나라 정부라 해도 두 나라 관계를 옛 주나라와 기자조선의 관계에 비유하는 정도전(鄭道傳)의 영리한 지적 아부에 냉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흔히 정도전은 고려 말의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국호를 정하는 데서도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이용할 정도였던 걸 보면 자주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진면목은 얼마 뒤에 더욱 생생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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