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두번째 지배집단(기자조선)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두번째 지배집단(기자조선)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6:25
728x90
반응형

 두 번째 지배집단

 

 

기자는 원래 중국 은나라의 신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이다(원래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실제와 무관하게 폭군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이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난잡한 파티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을까? 그런 자에게 충신의 말이 통할 리 없다. 기자는 주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그만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힌다. 그러나 결국 무왕(武王)의 쿠데타로 은나라가 무너지자 기자도 석방되었다.

 

새로 주나라의 문을 연 무왕은 은나라의 정치범인 기자를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기자는 높은 경륜과 뛰어난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아마 무왕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 2500년 뒤 조선의 이방원정몽주(鄭夢周)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되자 그를 살해해 버렸지만 무왕은 그보다 통이 컸던 모양이다. 그는 뜨거운 감자가 된 기자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는데, 그때 기자가 선택한 곳은 바로 한반도가 있는 동쪽 땅이었다(중국 측 사서에는 당시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했다고 되어 있지만 중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대륙 통일을 이룬 뒤부터이므로 아마 후대에 덧붙인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자가 이끄는 무리는 고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기자와 단군(檀君)은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문명의 본토이자 단군 집단의 먼 고향인 중국에서 주나라 왕의 허락을 받고 기자가 왔다는 사실이 무시하지 못할 권위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정권 교체로 오랜 사직을 이어오던 단군조선은 무대 뒤로 퇴장하고 다시 새로운 고조선이 성립되었다. 이 고조선을 당시 사람들은 뭐라 불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편의상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부른다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 그리고 나중에 나오는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고 그냥 고조선이라고만 말하는 게 보통이다. 그 이유는 지배집단만 교체되었을 뿐 고조선의 기본 성격과 체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마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중국계였으므로 민족적 자존심에 거슬린다고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구분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진행하면서 고조선과 중국의 연계가 더욱 밀접해지는 추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기서는 과거의 용어들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물론 당시에는 정권 교체 시마다 별도로 국호를 정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 이름들은 순전히 오늘날의 편의상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국내 역사학계에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단군을 한반도의 토착 세력으로 여긴다면 기자가 외부로부터 와서 단군조선을 대체했다는 게 영 찜찜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단군의 경우에도 한반도 토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까마득한 고대에 토박이냐 아니냐를 엄밀하게 따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내외의 경계가 뚜렷해야만 그런 구분이 가능할 텐데, 그 시대에는 중국에도 한반도에도 그런 민족적 경계나 강역 상의 구분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단군조선이든 기자조선이든 실제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영역으로 삼은 영토국가는 아니었으며, 어쩌면 혹시 고만고만한 여러 부족집단들 중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후대에까지 흔적을 남기게 된 부족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자조선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기자조선을 부각하려는 시도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어쨌든 기록에 이름이 전하므로 기자조선에 관해 어느 정도의 추측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기자를 떠나보내기 전에 무왕(武王)은 정치 9단인 기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경략을 한수 배운다. 서경(書經)에 전하는 홍범 9(洪範九疇)’가 바로 그것인데, 이 가르침은 기자 자신에게도 요점 정리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모양이다. 기자는 그것을 토대로 고조선에서 팔조법금(八條法禁)을 만들어 시행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여덟 가지 조항 중 세 조항밖에 없지만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조항이니까 그로 미루어 전체 내용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팔조법금이라니까 이름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 그 내용은 지극히 평이하다. 아무리 수천 년 전의 옛날이라 해도 불과 여덟 개의 형법 조항으로 고조선 사회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아마 당시 고조선은 상당히 단순한 사회였고 세력권도 그리 넓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굳이 비교하자면 팔조법금보다 600년 가량 앞선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무려 282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름으로만 기자조선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 사회 체제는 선대의 단군조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탓에 기자조선도 역시 단군조선의 경우처럼 처음 성립한 시기에 관한 기록만 있을 뿐 그 후 어떤 변화와 발전 과정을 거쳤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시기 구분상으로 신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단군조선과 달리 기자조선 시대부터 한반도는 청동기 문명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밖에 기자조선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기자 개인은 단군에 비해 훨씬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지만, 그 후의 고조선은 단군 시대처럼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반면 한반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던 시기부터 중국의 역사는 구름 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먼저 중국의 변화부터 보자.

 

 

책봉과 가르침의 교환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책봉하는 장면이다. 마루 한가운데 두 인물 중 오른쪽이 무왕이고 왼쪽이 기자다. 무왕은 기자를 책봉함으로써 정치적 서열을 정했지만, 그 대가로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 9라는 책략을 전했으니까 막상막하라고 할까? 그러나 개인들 간에는 그랬을지라도 후대에 중요해진 것은 역시 정치적 서열이다.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하던 주나라는 점차 주변 세계가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오히려 영항력이 줄어들게 된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 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뤄양(洛陽)으로 옮기는 치욕을 당하고, 왕실만 겨우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東遷)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고 있으나 사실상의 독립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 (그 후 두 번 다시는 그런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양 사상의 뿌리도 그 무렵에 생겨났다. 그 사상들 가운데서도 으뜸은 바로 유학 이념의 탄생이다. 유학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훗날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의 모든 부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거대한 학문 체계가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유학 이념의 뿌리는 가까이 보면 주나라가 성립한 기원전 12세기로, 멀리 보면 중국 문명의 탄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탄생한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핵심은 줄곧 충효 사상에 있다. 유학은 인간 세계가 수직적인 질서로 짜여 있다고 보고, 하위 질서는 상위 질서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이 체계화되는 것은 한()나라 때의 일이지만, 충효의 기본 이념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중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다(그랬기에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각 제후들은 내내 명목 상으로나마 주나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존했으며, 결국에는 대륙의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중국은 전형적인 농경문명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대 이집트와 같은 대추야자 농사, 고대 그리스와 같은 올리브나 포도 농사와는 달리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생산기술이 중시되는 쌀 농사의 문명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작 농경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와 농사 기술이다. 따라서 조상을 신격화하고 종교화하는 사상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황허 문명이 발생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유학의 뿌리는 있었다고 봐야겠다.그 이념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발전하고 체계화된 것이 바로 예()의 사상이며, 이것을 모태로 해서 성립한 국가가 바로 주나라다. 공자(孔子)는 그 예의 개념에 인()개념을 더해 유학을 창시했지만, 유학 이념을 사실상 완성한 나라는 주나라였다. 공자가 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던 이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수천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 내내 존주(尊周) 사상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유학의 란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에서 나온 개념이었고, 여기에 공자(孔子)가 추가한 ()’이란 곧 정치의 원리였다(‘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자 이념을 뜻한다). 따라서 유학은 처음부터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단군신화에서 유학의 색채가 엿보이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는 것, 백성들에게 미작 농경술을 비롯한 선진 문명을 전달했다는 것,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일찍부터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것 등의 내용은 원시적인 유학 이념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이유에서도 단군신화는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된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렇게 중국의 역사가 기틀을 잡아가는 시기에 한반도의 역사는 다시 기나긴 침묵 속에 빠져든다. 주나라와 기자조선이 성립한 기원전 12세기부터 전국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천 년 동안 한반도에는 여전히 고조선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사실 고조선이 존속했던 것도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군조선의 경우에는 하다 못해 단군이 2000세 가까이 살면서 다스렸다는 신화라도 전하지만, 기자조선은 얼마나 그 사회 체제가 유지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로서는 일단 다른 변화가 있기 전까지 고조선은 계속 기자조선의 체제로 존속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 대륙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고 정치 지도가 확정되면서 드디어 고조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중국 문명권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황하 문명이 탄생한 이래로 오랫동안 중원 일대에만 국한되었던 중국 문명은 주나라가 무너지고 제후국들이 판치는 세상으로 바뀌면서 화북과 화중을 아우르게 되며, 춘추 시대 말기에 초()ㆍ오()ㆍ월() 등의 제후국들이 흥기하면서 양쯔강 이남, 즉 강남까지 퍼져나간다. 이것으로 중국 대륙 전체가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변화는 남쪽보다 북쪽의 확대다. 중원의 북부에는 고비 사막이 버티고 있으므로 북상하는 중국 문명권은 자연히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랴오둥 방면으로 팽창한다. 전국 7웅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가 자리잡은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고조선이 다시금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가장 가까운 중국의 제후국인 이 연나라와 얽히면서부터다(나중에 보겠지만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연나라는 삼국시대까지 한반도 문명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메이저 문명과 마이너 문명 원래 중원에서 시작된 중국 문명(황허 문명)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동심원적으로 팽창했다. 따라서 중원이 중심인 것은 변함없으나 남쪽으로는 멀리 강남까지 확대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진시황제가 건설한 만리장성까지 넓어졌다. 덕분에 애매해진 것은 북동 방면의 랴오둥과 한반도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후 중국의 농경문명과 북방의 유목문명 사이에서 독특한 마이너의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분명한 시작

누락된 시대

두 번째 지배집단

중국과의 접촉

지배인가, 전파인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