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보다 강한 칼③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진법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8월 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당시 정도전(鄭道傳)은 이웃집으로 도망쳤다가 주인의 밀고로 잡혀나와 이방원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예전에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주시오.” 그가 말하는 ‘예전’이란 바로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덕분에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왔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또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 길로 이성계에게 달려간 여섯 왕자는 아버지에게 세자를 다시 책봉하라고 다그친다. 브레인을 잃은 이성계는 독자적인 판단을 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형제들은 모두 방원을 추대했으나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형인 이방과(李芳果, 1357 ~ 1419)에게 양보했다(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가뜩이나 ‘두뇌’를 잃고 헤매던 이성계는 두 아들이 여섯 아들에게 왕따를 당해 살해되자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할 기력이 없다. 그래서 다음 달인 9월에 새 세자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곧 정종(定宗, 1357 ~ 1419, 재위 1398 ~ 1400)이다. 그러나 이것은 1라운드에 불과했다(무인戊寅년에 일어났다 해서 이 사건을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간지干支로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조선시대 내내 흔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도 그랬듯 아직 개국초기증후군이 끝나려면 2라운드가 필요했다.
▲ 가지 많은 나무 이성계 집안의 가계도다. 옛날로 치면 여덟 아들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건국자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적을수록 분란의 불씨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당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서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했던 정도전(鄭道傳)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