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냐, 건국이냐③
건국의 또 다른 계기는 명나라에서 온다. 명나라에 파견되어 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무신들이 1390년 5월 명 황실에 야릇한 보고를 올린 것이다. 내용인즉슨 공양왕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며 이성계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침공할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닌 허위보고였지만 가뜩이나 신군부 정권을 바라보는 명나라의 눈길이 곱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삼총사가 그대로 덮어둘 리 없다. 개경에서는 곧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져 온건파의 태두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이숭인(李崇仁, 1349 ~ 92), 변안렬(邊安烈, ? ~ 1390), 우현보(禹玄寶, 1333 ~ 1400) 등이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더라면 조선 건국은 아마 실제보다 2년 앞선 1390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 보고를 무고로 결론짓고 윤이와 이초를 유배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짓자 사태는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숙청된 인물들이 다시 복직되고 숙청을 주도한 정도전이 오히려 유배된 것이다.
급진파로서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최대의 위기, 그러나 위기는 곧 찬스다. 코너에 몰린 이성계는 아직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장악하는 것만 이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먼저 해둘 조치가 있다. 그것은 이미 재가가 난 조준의 전제개혁안을 하루빨리 시행하는 일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포함된 온건파를 포함한 기득권층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한 것은 과연 새 왕조를 개창할 만한 리더로서의 냉정침착한 태도다. 그것이 1391년의 과전법인데,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만 온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온건파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은 치명타였다(과전법은 고려 말에 제정되었으나 조선의 토지제도로 기능하므로 하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왕권을 장악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마지막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수시중인 정몽주였다【고려 말 왕들과의 관련성에서 볼 때도 정몽주(鄭夢周)가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공민왕(恭愍王)이 살해된 뒤 우왕은 권문세족의 대표인 이인임(李仁任)이 옹립했고, 다음 창왕은 신진사대부의 온건파 대표인 이색이 옹립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공양왕의 옹립에 찬성했다. 이는 고려의 중앙권력이 구 세력에서 새 세력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왕 때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고 공양왕 때 이색(李穡)이 몰락했으니 정몽주(鄭夢周)는 그 다음이 자기 차례 라는 것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어느덧 온건파 최후의 보루로 남은 정몽주는 신군부가 왕위마저 찬탈하려는 기색을 감지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미 공공연하게 왕조 교체가 운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한사코 왕조는 그대로 두고 개혁으로써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자세로 일관한다. 그래서 1391년에 이성계의 브레인인 정도전(鄭道傳)과 심복인 남은(南誾, 1354~98)을 유배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마 그도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한때 개혁의 동지였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는 사건이 생기자 정몽주는 그가 개경을 비운 지금이 건국 삼총사를 제거할 마지막 기회라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성계에게는 이방원(李芳遠, 1367 ~ 1422)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비록 다섯째 아들이긴 하지만 아버지처럼 장차 왕위를 꿈꾸는 스물다섯 살의 야심찬 젊은이 이방원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이성계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보람은 아주 컸다. 문병을 핑계로 정세를 엿보러 왔던 정몽주가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趙英珪, ? ~ 1395)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된 것이다. 그간 많은 피를 손에 묻혀왔던 이성계라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섰더라면 아마 오랫동안 우의를 다져온 정몽주(鄭夢周)를 그렇듯 처참하게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어쨌든 이제 새 왕조 건국의 도정에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다. 1392년 7월 드디어 이성계는 공양왕을 퇴출시키고 군신들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비록 그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고 굳이 왕조 교체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나(조선이라는 국호가 채택되는 것은 그 이듬해다), 고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왕실의 성이 바뀌었으니 누구도 곧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을 의심치 않았다.
▲ 충신의 피 마지막까지 고려를 구하기 위해 애쓴 정몽주(鄭夢周)는 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미 고려 왕실은 사망선고를 받았으므로 설사 정몽주가 죽지 않았다 해도 고려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신군부’에 용감히 맞선 그의 저항은 1979년 쿠데타 세력에게 순순히 정권을 내주고 이후에도 침묵하다가 끝내 비밀을 안고 죽은 어느 대통령을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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