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흐리면③
이쯤 되면 고려 말 무신정권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비록 이제는 권력 주체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세를 휘두르는 무질서와 하극상의 시대라는 점은 똑같다. 그렇다면 무신정권기에 민란이 많았듯 사대부 정권기의 조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 중앙정치가 높아가자 지방정치도 문란해진다. 부패한 지방 수령들의 학정을 피해 유민들이 늘어나고 그들 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진다【만약 서원이 예전의 향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부패한 지방관을 탄핵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타락이 지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원은 성격이 바뀐다. 처음 생길 무렵만 해도 서원은 향교를 대신하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낙향한 사림파의 유생들이 세운 것인 만큼 점차 서원은 순수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성리학적 정치 이데올로기 교육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서원의 주 목적은 지방 정치를 감시하고 개선하는 일보다 장차 중앙정치를 사림 세력으로 바꿀 ‘성리학의 전사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 그 결과 서원은 조선을 사대부 체제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 되지만 수가 늘고 타락하면서 당쟁의 온상이 되어 버린다(공교롭게도 중국 송나라에서도 서원은 당쟁의 진원지가 된 바 있다)】.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화적 두목인 임꺽정(? ∼ 1562)이 탄생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평소에 익힌 무예를 밑천으로 도둑질과 강도질을 일삼는다. 소설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그가 과연 실제로 신분해방과 인간평등의 사상을 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사회과학적 인식의 결과라기보다는 아마 무질서와 하극상이 판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세력이 늘어나자 그는 한양이 가까운 양주 지역을 버리고 황해도로 가서 구월산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가 일반적인(?) 산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황해도의 지주와 부호들을 공격해서 제 몫을 챙기는 것과 더불어 관청을 습격해서 곳간을 열어 백성들이 가져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부의 입장에서 임꺽정은 그렇잖아도 무질서한 사회를 더욱 무질서하게 만드는 도둑놈이다. 그러나 두 양아치(윤원형과 이양)가 권세를 휘두르는 조정에서는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다. 하기야, 바깥에 대비하는 비변사 외에는 별다른 정규군마저 없었으니 그의 소재를 알았다 해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관군’이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그저 포도청을 지키는 포졸들이 관군의 주축이었고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는 여기에 일반 백성들을 보충해서 진압군을 꾸리는 식이었다. 굳이 조선의 정규군이라면 초기에 설치된 5위(五衛)가 있었으나 수도방위대의 기능으로만 국한되었고 전국적인 군 조직이 되지는 못했다】.
1560년부터 임꺽정은 한양에까지 진출하지만 정부는 성문을 굳게 잠가 사후 약방문이나 할 뿐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무능해 보인다 해도 타도해야만 무너뜨릴 수 있다. 임꺽정이 차라리 조직적인 반란을 획책했다면 모르겠으나 마냥 도둑질과 의적질만 계속할 수는 없다. 결국 그 해에 그의 아내와 참모가 체포되면서 임꺽정의 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뒤에도 임꺽정은 1년 이상을 더 버틴다. 권신 이양은 밥값이라도 하고자 1561년 평안도 관찰사로 가서 임꺽정 일당을 잡았다고 큰 소리쳤으나 알고 보니 가짜 임꺽정이었다(이양이 명종의 신임을 잃은 데는 이 사건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왜구 토벌에 여러 차례 공을 세웠던 뛰어난 무장 남치근(南致勤, ? ~ 1570)이 황해도에 투입되면서 이듬해 1월 임꺽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임꺽정은 보름 뒤에 처형되었지만 정작으로 맑아져야 할 윗물은 여전히 흐리다. 조선의 병은 아직 치료를 담당할 의사조차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더 악화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한번 땅에 떨어진 왕권은 좀처럼 본래 주어진 권한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왕은 언제나 무시해 버려도 상관없는 존재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사대부가 옹립한 왕이 탄생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