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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④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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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중화세계의 막내④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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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세계의 막내

 

 

어이없고 무의미한 그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강화도에서 들려온 소식이다. 일단 강화도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왕족과 관료들은 그곳이 남한산성보다 훨씬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아마 그들은 400년 전 몽골 지배기에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30년이나 버티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침략군의 의지가 그때와는 달랐던 것이다. 당시 몽골군은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마당에 굳이 고려 정부를 끝까지 핍박할 필요와 의지가 없었다(일설에 전하는 바처럼 몽골군이 뱃길에 약해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일본 정벌에서도 보듯이 그들은 현해탄도 건넜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을 공략하면서 바다처럼 넓은 큰 강들을 건넌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청군은 한시바삐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야만 중국 정복에 나설 수 있었기에 그보다는 다급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너편 해변에서 쏘는 청군의 대포알이 바다 건너 강화도 해변까지 날아오자 그들은 잔뜩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해변에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되니 청군이 배를 타고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한산성에서 논쟁이 주화론으로 정리되어 갈 무렵인 16371월 하순 드디어 청군은 배로 인천 앞바다를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의 빈궁들이 서둘러 원손(元孫, 왕세자의 맏아들)을 내시들에게 맡겨 배 편을 통해 충청도 당진으로 떠나게 하자 곧 청군이 들이닥쳤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남한산성 임시정부의 행보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주전론을 굽히지 않던 김상헌과 정온(鄭蘊, 1569 ~ 1641)은 자살하려다 실패했고(청 태종이 주전론자들을 보내라고 했으므로 그들은 어차피 적에게 끌려갈 운명이었다), 나라보다 가족들 걱정이 먼저인 인조는 적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고 항복을 결정했다. 1637130인조(仁祖)가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 현재 서울의 송파구 삼전동)에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림으로써 두 달 동안의 전란은 끝났다.

 

항복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와 다르지 않다.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앞으로는 청에게 사대하라는 것이라든가, 왕족과 조정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고 조공을 바치라는 것은 전과 똑같은 요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고, 청이 중국을 공격할 때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조항이 정식으로 포함된 것인데, 이것은 정묘호란 이후 청 측이 줄곧 주장하던 내용이다. 결국 조선은 애초부터 청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도 쓸데없이 난리만 불러들인 격이다.

 

청 태종은 궁극적 목표였던 중국 정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모든 준비는 그의 시대에 갖추어졌다. 그가 죽고 1년 뒤인 1644년에 청나라는 드디어 장성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한다. 이로써 중국의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276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와 더불어 중화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실로 오랫동안 동북아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중화세계가 해체되었으니 이제 동북아에는 앙시앵 레짐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한반도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동북아 전역이 새롭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그때 조선에서는 그 반대로 수구와 복고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세계가 멸망했다고 믿지 않고, 오히려 중화세계가 조선으로 옮겨왔다고 믿는다. 이제 조선은 중화세계의 막내가 아니라 맏이가 된 것이다.

 

 

 국치의 기념품 무모한 항전은 결국 보람 없이 끝났다. 사진은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을 기념하는 치욕의 유물이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이 비석은 청 태종 공덕비인데, 흔히 삼전도비라고 부른다. 사실 예전에도 그런 식의 공덕비는 많았는데 (관구검, 소정방, 유인원 등), 유독 삼전도비를 치욕으로 여기는 이유는 역시 중화 사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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