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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②: 실학의 두 갈래 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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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2장 한반도 르네상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②: 실학의 두 갈래 길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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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그렇다면 실학은 성리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겨났을 것이다. 과연 최초의 실학이라 할 만한 연구가 나온 시기는 바로 비중화세계가 중화의 본산인 중국을 정복했을 때와 일치한다. 1634년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서 지봉유설(芝峰類說)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실학서다.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의 두 시대에 걸쳐 정부 요직을 맡았다면 얼마나 영악한 인물이겠느냐고 여기겠지만, 실상 이수광은 눈치빠른 모리배와는 거리가 먼 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험난한 시대에도 참된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참된 선비였기에 편협한 중화적 세계관에 물들지 않고 중국에 가서 천주실의(天主實義)(이탈리아의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쓴 그리스도교 개설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서양의 문물을 가져와서 조선에 최초로 소개했다(그런 점에서 이수광은 소현세자의 선배격이 된다).

 

그에 뒤이어 17세기 후반에는 재야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 ~ 73)이 토지와 법, 관직 임용 등 조선의 제반 제도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연구를 남긴다. 유형원은 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는 공식적으로 실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1769년에 영조(英祖)가 그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죽은 지 100년이나 지나긴 했으나 그래도 국왕에 의해 인정된 덕분에 그의 책 반계수록(磻溪隧錄)은 최초의 정부 공인실학서가 될 수 있었다【『지봉유설의 지봉과 반계수록의 반계는 모두 지은이의 호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은 동의보감(東醫寶鑑)처럼 특수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가 다 특정한 지은이가 없고 대표 편찬자가 지은이처럼 간주된다(이를테면 정초의 농사직설이나 성현의 악학궤범). 일부 선비들의 개인 문집 같은 책들만 그 선비의 사후에 간행되면서 지은이의 호가 제목에 붙는 식이었다[이를테면 조광조의 정암문집(靜庵文集)이나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그런데 실학서도 그런 문집과 같은 제목을 취한 이유는 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이 아니고(조선시대에 서적이란 일반인을 독자로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 내용이 백과사전식으로 잡다하기 때문이다(이는 곧 학문이 체계적으로 분류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누가 최초의 실학자고 무엇이 최초의 실학서냐는 것은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수광과 유형원에게서 향후 실학이 나아갈 두 가지 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성리학에 토대를 두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한다는 취지에서는 모든 실학자들이 마찬가지지만 개혁의 방향은 그 두 사람이 각기 제시한 두 갈래 길이다. 우선 이수광이 보여준 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이 취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조선은 서양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루트도, 권한도 없으니까 이 노선을 채택할 경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서양 문물을 서학(西學)이라 불렀는데,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북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민족이었던 탓에 조선에서는 그것을 북(北學)이라 불렀다. 북학파의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대외 교류가 중요하므로 북학파는 상업을 중시하고, 그 상업을 뒷받침할 공업을 진흥하고, 화폐경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비해 유형원이 안내한 길은 말하자면 내부 개혁 노선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산업이라면 단연 농업이므로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토지제도가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입장을 취하는 실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제 개혁을 부르짖는다. 그 모델은 중국의 옛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고 전해지는 정전법(井田法)이다(정전법이란 토지를 자 모양의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한가운데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내고 나머지를 경작자들이 가진다는 이상적인 제도다).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유형원의 균전론(均田論)이나, 토지 보유 상한선을 정해 대지주들을 제한하자는 이익(李翼, 1681 ~ 1763)의 한전론(限田論)은 모두 정전법(井田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팎의 길 실학이라니까 뭔가 참신한 느낌을 주지만, 실은 위기에 처한 체제를 개혁하자는 유학의 자기반성에 불과하다. 개혁의 길은 두 가지, 즉 안과 바깥이다. 위쪽은 바깥의 길을 상징하는 서학의 교과서인 천주실의의 번역본이고, 아래쪽은 내부 개혁의 길을 제시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책은 집권 기득권층의 강력한 보디체크에 밀려 결국 이론으로만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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