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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③: 규장각의 참된 임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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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③: 규장각의 참된 임무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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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우선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의 본연의 임무를 확대해서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개혁의 운을 뗀다. 세자 시절부터 수입하고 싶어했던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사고전서란 건륭제 때 이루어진 도서 집대성이다.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편찬 작업을 이어받은 작업인데, 고금도서집성처럼 항목별로 분류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새로 교정하고 정서하고 지은이 소개까지 붙여서 총정리한 것이다. 무려 8만 권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청나라 조정에 반대하는 입장의 서적들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첨삭하기도 하고 금서로 분류하기도 했으니 정치적 잣대가 상당히 반영된 총서라고 봐야겠다. 제목에서 사고(四庫)란 네 군데 서고를 가리키는데, 모두 네 질(민간 열람용까지 합치면 일곱 질)을 인쇄했던 탓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역시 동양에서의 서적이란 보급용이 아니라 보관용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를 비롯해서 각종 도서 수만 권을 보관하게 하는 한편, 활자의 주조에서부터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 이르기까지 출판의 총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나중의 일이지만 정조자신의 저서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규장각에서 간행된다). 이 기능도 물론 중요하나 정조가 머릿속에 그리는 규장각의 참된 임무는 아니다. 규장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그는 드디어 애초부터 상정해왔던 과제를 규장각에 부여하는데, 그것은 바로 국왕의 비서실이라는 기능이다. 즉 정조는 규장각을 도서관이자 비서실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정부 도서관이라면 홍문관이 있고 왕의 비서실이라면 승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기관들은 둘다 오랜 사대부(士大夫) 체제를 거치면서 왕의 직속기구라는 본래의 형질을 잃었고, 매너리즘에 빠져 그나마 제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정조(正祖)가 직접 밝힌 규장각의 설립 취지는 이렇다. “승정원과 홍문관은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바로잡을 수 없으니 내가 바라는 혁신 정치의 중추 기관으로서 규장각을 설립했다.” 그는 규장각이 홍문관과 승정원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국왕 직속 정치 기구로서의 역할까지 맡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규장각을 운영할 경우 그가 즉위 초부터 구상한 문화 정치의 기치도 내세울 수 있으니 그로서는 일거양득이다정조(正祖)가 설정한 규장각의 이념은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두 가지다. 우문지치란 말뜻 그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정치(‘란 숭상한다는 뜻이다)이고, 작성지화란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도다. 따라서 겉으로 문화 정치를 표방하고 안으로 왕당파를 육성해서 참다운 왕도정치를 펼치겠다는 그의 꿈이 집약되어 있는 이념이다. 이보다 더 왕국화 작업의 취지를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그 이념은 그간의 사대부 정치가 문화 정치마저도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과사전의 시대 르네상스를 벗어나 근대의 문턱에 접어들자 유럽인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학문적 작업은 신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문으로 세상만물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바로 백과사전이었다. 사진은 유럽과 동시대에 간행된 중국의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오른)고금도서집성(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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