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②
불과 며칠 만의 모의로 거사한 것치고는 상당히 면밀하고 조직적인 봉기였다. 시위대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의 장터로 달려가서 장을 취소하고 규모를 불렸다. 초군(樵軍, 나무꾼 부대)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한 것에 어울리게 그들은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농기구를 무기로 움켜쥐었으니, 오늘날 역사 기록화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농민군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은 봉기에 불참하는 농민들에게서는 벌금을 받고 반대하는 농민들에게는 보복을 가하는 등 급조된 시위대답지 않은 노련미를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수가 크게 늘어난 농민군은 곧바로 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가 그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애초부터의 한계였다.
백낙신에게서 도결을 철폐한다는 결정을 받아내고, 탐학을 일삼던 그의 부하들과 하급 관리들을 처단하고, 관청과 결탁해서 농민들을 착취하던 부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는 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뒤 농민군은 그것에 만족하고 자진 해산했다. 중앙정부에서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은 그 다음이다. 안핵사(按覈使, 안핵이란 사태를 진정시키고 실상을 조
사한다는 뜻이다)로 파견된 박규수(朴珪壽, 1807 ~ 76)는 겨우 나흘 동안에 벌어진 사태를 이후 석 달이나 걸려 수습했는데, 농민들은 유계춘 등 주도자 10명이 참수된 것을 포함해서 약 100명이 처벌받은 데 비해 관리들 중 처벌된 자는 스무명도 채 못 되었으니, 농민군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고 하겠다【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실학 사상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었으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실망스런 판결이지만, 당시의 체제로서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조정에 올린 보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진주의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 침학(侵虐)한 까닭으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 난민들의 무도한 행동은 통분스럽습니다만,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실은 스스로 빚은 일입니다.” 원래 안핵사란 난을 수습하기 위해 임명한 임시직책이었던 탓에 책임지기를 꺼려 누구도 맡고 싶어하지 않았으니, 박규수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다한 셈이다】.
그러나 한 번 치솟은 민란의 불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해 9월에는 바다 건너 제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봉기의 계기도 진주의 경우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어서 이번에는 지방관의 탐학 때문이라기보다는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고 나섰으니, 국가의 기틀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산간을 일구어 만든 화전에까지 제주 목사 임헌대(任憲大)가 과도한 세를 부과하자 농민 몇 명이 조세 수납을 담당한 서리의 집을 찾아가 때려 부수고 그동안 받아먹은 뇌물들을 불사른 게 제주민란(濟州民亂)의 신호탄이 된다. 순식간에 1천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목사의 약속을 받아내고 일단 해산했으나 이제 문제는 단순히 조세에 있지 않다.
이 소식이 제주 인근으로 퍼져 나가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제 뇌물을 착복한 관리들과 부호들의 집을 때려부수는 것은 기본 코스고, 거기서 더 나아가 농민들은 목사에게 부패의 주범인 서리 다섯 명을 처단하라고까지 요구한다. 농민들의 서슬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사가 관청을 버리고 도망치자 농민들은 목사 대신 행정을 맡아 처리하니, 10년 뒤 프랑스의 파리에서 생겨나는 코뮌이라는 시민 자치체의 원조격이다. 결국 이듬해 봄에 중앙에서 안핵사가 파견된 뒤에야 사태를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처형된 지방관의 수와 농민 지도부의 수가 스무 명 내외로 엇비슷해졌는데, 이것도 진주민란(晉州民亂)에 비해 진일보한 결과라고 해야 할까?
▲ 난세의 지도 남도에서 민란의 조짐이 커지고 있을 무렵인 1861년 김정호(金正浩)는 오랜 기간 발로 뛴 결실을 얻었다. 최초의 상세한 한반도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탄생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지도와 대체로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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